[수필] 23개월의 하늘, 그리고 우리 > 국제

본문 바로가기

국제

[수필] 23개월의 하늘, 그리고 우리

profile_image
노동자신문
2025-09-01 22:42 106 0

본문


선아 (호주 교민)



왠지 모르게 며칠째, 입술 끝에 맴도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하늘’이라는 오래된 노래. 한 때는 함께 불렀지만, 이제는 '변절한' 시인의 이름 때문에 꺼내 들기조차 머뭇거리던 그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그 노래의 가락과 기억이 나를 자꾸 불러냈습니다. 

마치 오래 잊혀진 목소리가 다시 내 귓가에 다가와 "네가 이 고통을 외면하지 마라"고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그 노래 속 하늘은 검은 하늘이었습니다.


노동자를 짓누르는 사장, 손을 살릴 수도 망가뜨릴 수도 있는 의사, 우리를 감옥으로 끌고 가는 경찰,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 관청의 관리들… 모두 우리 위에 얹혀 내려앉은 ‘하늘’이었습니다. 

그 하늘은 푸른 하늘이 아니라, 숨을 막고 짓누르는 먹구름이었습니다.


그 시 속에서 겨우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은, 노동자도 언젠가 서로의 하늘이 될 수 있다는 갈망이었습니다. 

나 역시 그때는 그 노래를 부르며, 언젠가 우리도 서로에게 하늘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하늘의 노래를 다시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 삶 역시 그 노래의 한 구절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204f1936e648860a34498fcf5b46fac7_1756737013_1669.jpg
 

나는 멜번에서 이민자로 살아갑니다.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고된 노동에 몸을 내 맡깁니다. 

나는 주방에서, 푸드 서비스 어시스턴트, 키친핸드로 하루를 보냅니다. 

영어도 서툴고, 뒷배경도 없는 이민자들이 흔히 하는 일입니다. 


아침이면 식판을 나르고, 점심이면 쏟아지는 잔반을 받아내 쓰레기통에 쏟아 붓습니다. 

뻘처럼 무겁게 가득 찬 쓰레기통을 비울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발바닥은 돌처럼 굳어갑니다. 

다시 수도 앞에 서서 치익 소리를 내며 고압수를 뿜어 그릇을 헹구고, 기계에 밀어 넣고, 돌아온 그릇을 행주로 훔치고 제자리에 쌓아 올립니다. 


여덟시간 내내 서 있는 동안, 몸속 모든 관절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릅니다. 

하루가 끝날 무렵,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빗자루를 잡은 손은 덜덜 떨리고, 마지막 마대질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멈췄습니다. 

몇 주 째 일을 못했습니다. 손의 인대가 찢어진 겁니다. 

설거지와 잔반 처리, 무거운 쓰레기통을 감당할 때도 버텨내던 손이 하루아침에 어처구니 없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인대가 찢어진 손가락을 붙잡고 잠에서 깰 때면, 나는 속으로 울며 물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니?” 


204f1936e648860a34498fcf5b46fac7_1756737042_0253.jpg
그 질문은 내 마음을 후벼 팠습니다. 

왜냐하면 곧 치료 받고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죽음의 벼랑 끝에 선 것도 아니고, 단지 며칠, 몇 주의 고통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 위에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내 고통이 너무도 작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구호식량을 얻으러 나온, 대여섯 살 남짓 되었을까 싶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작은 어깨 위로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가족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물려주려고 길을 나선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폭격의 잔해 속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피로 물든 돌 무더기 위에 잘린 팔과 다리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204f1936e648860a34498fcf5b46fac7_1756736566_3267.jpg
 

나는 그 장면들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내 손의 고통이 너무 작고 하찮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이상한 공명이 내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내가 저 아이들 같았습니다. 

내가 잔해 속에 쓰러진 팔레스타인의 형제 같았습니다.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왜 이렇게 짓밟히기만 해야 하는지, 울컥 울음이 터졌습니다. 

“살려고 그러는 건데, 왜 이렇게 밟히기만 해야 하나.”


나는 치료를 받고 회복할 수 있지만, 그들은 죽음으로 떨어져야 했습니다. 

내 고통은 손톱 만큼의 상처에 불과했지만, 

그 작은 고통을 통해서 나는 어떤 거대한 연대의 강물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프고 당해본 사람은 안다. 

하늘을 빼앗겨 본 사람들은 안다.


오늘, 멜번에서 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고, 학살을 중단하라고 외치기 위해. 저는 오늘 용기를 내어 "한국인은 팔레스타인과 함께합니다. 

멜번에서 가자까지!"라고 적힌 플랭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민자로서, 낯선 땅에서 내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늘 주눅 드는 일이었는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204f1936e648860a34498fcf5b46fac7_1756735709_7476.jpg
△ 
호주 전역, 시드니와 멜번, 브리즈번을 비롯한 40여개 지역에서 수십만명이 거리로 나와 가자지구 인도주의 위기에 대한 분노와 연대를 표했다


플랭카드를 들고 서 있자,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었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응원해 주었어요. 

어떤 이는 팔뚝을 힘차게 흔들어 주었고, 또 다른 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한 할머니는 제 어깨를 토닥여 주시며 "고맙소, 함께 해줘서"라고 속삭이셨습니다. 

그 순간마다... 저는 여성 이민자로서의 외로움과 두려움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것을 느꼈어요. 

이 땅에서도 제 목소리가 의미 있다는 것, 제가 여기 속해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죠. 


204f1936e648860a34498fcf5b46fac7_1756738089_227.jpg
 △ 플래카드를 직접 만들어 시위에 참여한 필자 (오른쪽)


팔레스타인의 사람들이 빼앗긴 것은 단지 땅이 아니라, 그들의 하늘입니다. 

참혹한 제노사이드, 학살과 파괴. 

그건 단지 뉴스 헤드라인이나 숫자가 아니라 삶이고 희망이고 사랑이었습니다. 

밝고 따스했던 행진하던 인파의 미소 속에서도 돌처럼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는 현실입니다. 

동시의 진실은 이것입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것!


국제법 전문가들이 경고합니다.

23개월째 이어지는 집단학살, 6만 명이 넘는 희생. 국제사법재판소와 형사재판소의 판결을 마냥 기다릴 수 없다고. 

지금 당장 국제 보호군을 파견하고, 무기 금수 조치를 하고, 이스라엘과의 외교·경제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그러나 위에서 수혜처럼 떨어질 인도주의를 기다리고 지켜보기만 하는 것, 우리 스스로가 인간임을 포기하고 기계임을 인정하는 건 아닐까요?



204f1936e648860a34498fcf5b46fac7_1756737337_1345.jpg
 

우리 역시 자본의 압박 속에서, 권력의 통제 속에서, 검은 하늘에 눌려 살아갑니다.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먼저 순서가 되었을 뿐, 결국 우리 모두는 이 억눌린 삶의 질서 속에서 짓눌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이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외치는 것은 동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아이를 살리라는 외침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인간 됨을 지켜 달라는 외침입니다. 

오늘 나는 다시 ‘하늘’의 노래를 떠올립니다. 우리는 서로의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포탄이 쏟아지는 밤에도, 노동의 쓰라린 고통 속에서도, 먹구름처럼 짓누르는 검은 하늘이 아니라, 서로를 떠받쳐주는 푸른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의 노래는 하늘을 열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이었다고. 우리는 결국 서로의 하늘이 되어 살아 남았다고.


2025.8.25. [블랙와인맬번] 블로그에 실린 글을 필자의 동의를 받아 게재합니다.

☞  https://blackwinemelbourne.tistory.com/m/8



<하늘>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 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 https://youtu.be/qdZcHFC6pUY?si=sg03At-GT77i6lsT  (하늘, 박노해 글, 윤민석 곡)


69288d414d81a99e4d41d828e0826d72_1747298959_7784.jpg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