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신선 농사 > 문화

본문 바로가기

문화

[수필] 신선 농사

profile_image
노동자신문
2025-09-03 19:27 132 0

본문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5450_0572.jpg


이철의 (시간제 노동자이자 돌팔이 농부)


귀촌한지 6년이 다 되어 간다. 2019년말 평생 다니던 철도공사에서 퇴직한 뒤 곧장 시골로 내려왔다. 이곳 홍성에서 나는 동생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 나의 농사에서 가장 두려운 적은 풀이다. “풀 이기는 장사없다.”는 말처럼 풀은 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화해할 수도 없으며, 항복할 수도 없는 영원한 강적이다. 제초제를 쓰지 않는 유기농에서 풀은 영원히 굴러떨어지는 시시프스의 바위처럼 농민들의 숙명이고 업이다. 


4월의 풀은 아기 고양이처럼 약하고 귀엽지만, 5월, 6월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5월의 풀은 죽어도 말을 안 듣는 중학 2년생이라 할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하고, 심하게 혼내면 가출하는 녀석들처럼 예측불허의 성정을 가지고 있다. 명아주, 쇠비름, 참비름, 바랭이 등 귀여운 이름을 가진 풀싹들은 금방 자라서 고추, 가지, 오이, 호박같은 작물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이놈들이 동급생들 삥을 뜯는 일진들처럼 대파를 포위하면 불쌍한 파는 크지도 못하고 비리비리하다 어느 결에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6월의 풀은 학정에 견디다 못해 총궐기해 일어나는 농민 반란군들 같다. 예초기로 후려친 뒤 며칠 지나면 어느새 더 무서운 세력으로 자라나 농사일에 서툰 나를 비웃는다. 도꼬마리를 해치우면 명아주가 자라나고, 명아주를 후려치면 쇠비름이 대신한다. 참비름, 까마중, 환삼덩굴을 혼내주면 드디어 바랭이가 자리 잡는다. 내 밭에서 바랭이는 가장 무서운 강적이다. 이놈은 땅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데 나중에는 천근의 힘으로 뽑아도 꿈쩍하지 않는다. 낫으로 자르면 사나흘이면 다시 커서 더 무성하고 억세게 자라 마침내 온 밭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졌다. 이놈들아,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거 같으냐? 나중에는 몰라도 오늘만은 승리하고 말테다.” 고집불통 영감은 드디어 예초기를 둘러메고 밭으로 간다. 바랭이고 뭐고 온갖 풀을 예초기로 후려치려는 것이다. 예초기를 돌려 풀을 뿌리 근처까지 자르고 있자면, 복수하고 있다는 통쾌함과 노동을 해도 이렇게 힘차게 해야 하는 맛이 나지 하는 자부심이 올라온다. 


예초기를 쓰지 못할 때에는 오로지 낫으로 풀과 싸웠다. 오일장에서 산 육철낫—조선 낫을 고향에서 부르던 이름이다.—을 숫돌에 썩썩 간 뒤에 풀을 잘라 풀 위에 덮어놓는 것이다. “이런 걸 일컬어 이이제의(以夷制夷)라고 하는 거여. 아니지 이초제초라고 해야겠군.” 자부심에 찬 영감은 중얼중얼하며 오늘만큼은 풀을 이기고 있다는 정신승리법을 펼치고 있다. 

예초기를 쓰게 된 뒤부터는 농사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호박이나 오이밭은 물론이고 고추 고랑, 가지 고랑, 참깨밭과 들깨밭까지도 모두 예초기로 해결한다. 아차하면 작물이 예초기 날에 결딴이 난다. 그러면 영감은 “일을 그렇게 거칠게 하면 안되지. 오늘 다섯 개 이상 들깨 목을 자르면 반성하는 의미로 점심을 굶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다 목표치를 넘어가면 밥을 굶을 수는 없으므로 “니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그래도 더 잘하기 위한 과정인거여.”하고 정신승리법을 써서 위안을 삼는다.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074_2563.jpg

영감의 밭에는 온갖 작물이 자라고 있다. 가장 너른 면적에 호박과 오이, 그리고 참외가 차지하고 있다. 옥수수도 만만치 않다. 옥수수에 한이 맺힌 영감은 올해 천그루를 심어 원을 풀었다. 삶아 먹고, 구워 먹고, 밥에 놓아 먹자. 뻥튀기도 튀겨 겨우내 일용할 양식으로 삼자. 밭에서 자라는 옥수수를 보면서 영감은 흐뭇한 상상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머니와 형제들, 작은 아버지와 고모들같은 친인척에게 보내주자. 노동단체와 녹색당, 작은책에도 보낼 계산을 하고 있다. 그러면 친인척들은 “걔가 데모만 할 때는 숭악헌 놈인줄 알았네. 늙어서 철이 들었나,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여.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지 천성은 그렇게 독헌 놈이 아닌가 봐.”하고 영감을 달리 생각할 것이다. 운동하는 동무들에게는 “돈은 나가서 버는 거지. 농사로 돈 벌자면 뼈가 삭어유. 잉여 농산물을 나누는 거니까 고마울 것도 미안할 것도 없슈.”하고 큰소리를 칠 것이다. 옥수수, 참외, 고구마같은 작물은 바로 쪄서 지역의 녹색당 동무들과 나눠 먹을 수 있다. 첫물 옥수수를 따면 지역 당원들과 옥수수 잔치를 하기로 했는데 영감은 제때 비가 내리고, 태풍이 늦게 오기를 비는 것이다.


영감의 농사법을 일컬어 ‘신선농법’이라고 한다. 농사일을 즐겁게, 무리하지 않고, 의무감을 가지고 하지 않는다. 풀이나 벌레와 싸우는 것도 사실은 즐겁다. 아무려면 그놈들이 평생 상대한 자본가들보다 더하겠는가? 전쟁에서는 질지라도 그날그날 전투에서 이기면 “야 이 버러지 같은 놈들아. 나 아직 안죽었다구. 늬들보다 더한 것들하고 투쟁해 온 나여. 풀 따위가 감히 어딜 덤벼들어.” 하고 큰소리치며 웃을 수 있다. 고추나 과일농사처럼 손이 많이 가는 농사는 사양한다. 나는 심어놓으면 알아서 자라는 애들을 좋아한다. “늬들에게 자율성을 주겠다. 알아서 크면 조장해 줄 것이고 도태되는 놈들은 뽑거나 목을 잘라주겠다.”하고 위협한다. 잘난 체할 때는 “늬들이 농사법가를 알어? 겪어봐야 무섭다는 걸 알지. 목숨이 아깝거든 알아서 해라.” 하고 타이르면 알아서 쑥쑥 자라는 것이다. 신선농법의 유래나 원조가 되는 형님의 이야기는 지면이 부족해서 더 쓰지 못하겠다. 아쉽다.


§ 이 글은 월간 <작은책> 8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 편집자 주


 

<잡초들>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122_4584.jpg
△ 쇠비름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323_8968.jpg
△ 바랭이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156_4418.jpg
△ 명아주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180_6571.jpg
△ 깨풀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198_02.jpg
△ 강아지풀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218_7742.jpg
△ 개비름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239_0751.jpg
△ 봄여뀌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257_3834.jpg
△ 방동산이


abdc33e0188d4f7fbc3591732de0ed82_1756897302_2586.jpg
△ 개여뀌


69288d414d81a99e4d41d828e0826d72_1747298959_7784.jpg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