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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가 열전] 섬북근거지의 개척자 시중쉰(習仲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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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신문
2025-04-30 10:37 12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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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의

 

쉬중신(習仲勛). 위대한 공산주의 전사.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 시중쉰은 1913년 산시성(陕西省) 푸핑현(富平縣)에서 태어났다. 그는 산시·간쑤 변구의 혁명근거지를 창건한 사람중 하나이며 국무원 부총리와 중공 11차 중앙위원회 서기처 서기. 12차 중앙정치국원 및 서기처 서기를 역임했다. 5차 및 7차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20131015, 시중쉰 동지의 100주년 탄신 기념일에 중앙의 비준을 거쳐 중앙당사연구실에서 시중쉰 문집’,,‘시중쉰 기념문집’,  ‘시중쉰 화집을 발간하였다.(이상 중국포털 바이두 기록)

 

시중쉰은 현재 중국 공산당 서기이자 국가주석인 시진핑의 아버지이다. 2002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의 아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진핑이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중쉰은 혁명원로이기도 하고 엄중한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승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혁명에 투신하여 일생동안 당과 혁명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펑더화이에 연루되어 실각했으며 16년 동안 조사와 구금, 그리고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문화대혁명 기간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으며 장녀는 박해 끝에 사망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 농촌으로 하방되었다. 19784인방이 축출된 후 비로소 복권되어 중공 지도부의 핵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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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중쉰은 1926, 13세의 나이로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다. 엄청나게 조숙한 청소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2815세의 나이에는 학생운동을 하다 국민당에 붙잡혀 투옥되었으며, 1930년에는 국민당 서북군에 투입되어 병사들을 대상으로 정치공작을 벌였다. 1932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켜 공농홍군 산간유격대를 조직하고 지대 서기를 맡았다. 혁명근거지를 창건하고 유격활동을 하던 시중쉰은 1933년 류즈단과 함께 산간변구 혁명근거지를 창건하고 변구특위 위원과 군사위원회 서기, 청년특위 서기를 겸임했다. 그리고 유격대 총지휘부 정치위원, 혁명위원회 부주석 및 주석등을 맡았다. 류즈단과 더불어 산시성의 혁명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193411월에는 산간변구 소비에트 정부 주석에 선출되어 국민당군의 포위토벌을 여러 차례 막아냈다


1935년에는 섬북과 산간변구의 두 근거지를 하나로 병합했으며 여전히 소비에트 정부 주석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을 이끌던 소련 유학파 왕밍(王明)등의 모험주의 노선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류즈단과 함께 압송되어 처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때 마침 마오쩌둥이 장정 끝에 섬북에 도착해 그와 류즈단을 석방하여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앙 홍군이 섬북에 안착하게 된 것도 그와 류즈단 등 서북 근거지를 개척했던 이들 때문이었으니 공로가 결코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당시 중앙 홍군은 구이저우성과 윈난성, 쓰촨성을 떠돌며 국민당군과 싸우느라 병력이 10분의 1로 줄어드는 간난신고의 고난을 겪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중앙 홍군은 쓰촨성에서 장궈타오의 당권 탈취를 피해 야반도주하다시피 북상했는데, 마오가 우연히 얻은 신문을 보고 섬북에 근거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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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류즈단은 원정 중에 전사하고 시중쉰은 관중 특구 소비에트 정부 부주석과 서기를 맡는 등 순조롭게 혁명사업에 종사하였다. 어릴 때부터 지역을 개척해 왔으므로 그보다 더 섬북을 잘 알고 섬북의 민중들로부터 신임을 받는 인물이 없었다. 1943년 마오쩌둥은 그에게 당의 이익 실현에 첫째가는 인물이라는 글씨를 써 줄만큼 신임이 돈독하였다. 1945년에는 중공 후보 중앙위원과 조직부부장을 맡아 점차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하였다.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1947년 중공 수도 옌안이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마오쩌둥은 시중쉰을 펑더화이의 조수로 삼았다. 101의 열세한 병력에 펑더화이와 시중쉰은 치고 빠지는 기동전으로 국민당군을 괴롭혔으며, 1948년에는 전세를 뒤엎고 옌안을 탈환하는 등 섬북을 평정하게 되었다. 1950년 펑더화이가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시중쉰은 서북에 남아 서북국 제 2서기, 서북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아 군정을 이끌었다. 펑더화이가 휘황한 개선을 하고 국방부장, 부총리로 승승장구할 때 시중쉰도 중공 선전부부장등 요직을 맡았으며 1956년에는 중앙위원, 1959년에는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9년 대약진 운동을 비판한 펑더화이가 실각하자 그에게도 곧 어둠이 닥쳤다.

 

19629, 중공 810중전회에서 그는 소설 류즈단에 연루되어 실각했다. 캉성의 모함을 받은 그는 문화대혁명 중 박해를 받고 끝없는 조사와 투옥 등 장장 16년간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의 맏딸인 시허핑은 박해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고, 차남 시진핑은 7년간 산시성의 농촌에 하방되어 있었다. 음지는 양지가 되고 고난 끝에 광명이 찾아왔다. 마오쩌둥 사후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체포되었다. 이미 사망한 캉성은 당적이 박탈되었으며 펑더화이와 시중쉰은 복권되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지 오래되었다. 복권된 후 시중쉰은 광둥성장겸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 박해를 받은 이들의 복권을 추진하였고, 덩샤오핑이 지휘하던 개혁개방을 앞장서 실천하였다. 광둥성이 지리와 조건이 경제발전에 유리하다고 역설하여 덩샤오핑의 지지를 얻었다. 1982년 시중쉰은 정치국원 및 서기처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1988년에는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상무위부위원장겸 사법위원회 주임 등을 맡았다. 시중쉰은 2002년 베이징에서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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