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철학 강좌 ― 제2강 철학의 근본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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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월간지 <정세와노동> 217호(2026.03)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자 주
신재길 (편집위원)
지난 “제1강 철학을 시작하며”에서 우리는 철학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세계관이 인간의 삶과 실천에 얼마나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철학의 심장부로 들어가 보자. 바로 ‘철학의 근본문제’이다.
1. 왜 ‘근본문제’인가? ― 철학의 나침반
어떤 학문이든 모든 질문을 꿰뚫는 하나의 뿌리 물음이 있다. 경제학이라면 ‘가치는 어디서 생겨나는가’가 그것이고, 의학이라면 ‘무엇이 생명을 지속시키는가’가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에도 모든 철학적 논의의 밑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이 물음을 ‘근본문제’라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중요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철학의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나침반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다. 그러나 나침반 없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철학의 근본문제가 바로 그렇다. 우리가 어떤 철학적 물음을 탐구하든 ―자연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자유로운가― 그 모든 물음은 결국, 하나의 뿌리 물음과 연결된다. 즉 ‘세계(물질)와 나(의식)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모든 철학적 논의의 방향이 달라진다. 유물론의 방향으로 갈 것인가, 관념론의 방향으로 갈 것인가. 이것이 ‘근본’이다.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이 근본문제를 이렇게 정의했다. ‘모든 철학, 특히 근대 철학의 위대한 근본문제는 사유와 존재의 관계 문제이다’ 즉, 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가 철학의 핵심이다. 나침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듯, 이 물음은 항상 철학의 중심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나침반은 단 하나의 바늘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인류가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실천을 쌓아 가면서, 철학의 핵심 물음은 세 가지 층위에서 심화되어 왔다. 첫 번째는 존재와 무(有와 無)의 문제, 두 번째는 물질과 의식의 문제, 세 번째는 인간과 세계의 문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이 셋은 동등한 세 개의 별개 문제가 아니다. 각각 철학 체계 안에서 서로 다른 고유한 역할과 지위를 갖는다. 유와 무의 문제는 존재론의 근본문제이고, 물질과 의식의 문제는 인식론의 근본문제이며, 실천론의 근본문제인 인간과 세계의 문제는 위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실천을 통해 통일하는 지반이다. 이 세 층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맑스주의 철학, 즉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룬다. 지금부터 이 논리를 하나씩 풀어 보자.
인류 최초의 철학자들은 이 세계는 왜 존재하고 어떻게 존재하며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철학이 시작되었고 이는 존재론적 물음의 출발이자 존재론적 패러다임의 근본문제이다. 신화는 더 이상 충분한 답이 되지 못했다. 이성으로, 논리로 세계의 존재를 설명해야 했다. 이것이 철학적 사유의 가장 오래된 층위다. 존재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답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 답에는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언뜻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없는 것’이 있다면 세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을 꼼꼼히 따져보면 이상한 점이 생긴다. 여기서 ‘없는 것’은 부분적 결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무 또는 순수 無를 말한다. 따라서 순수한 절대 무가 있다면 존재 즉 세계는 있을 수 없다. 결국, 현실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명제에서 형식논리가 탄생한다. A=A이지 A=not A일 수는 없다는 사고이다. 이도 분명하고 명확한 사고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는 있는 것이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것이 생성되기도 한다. 그래서 있는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이고 현실은 가상 세계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세계를 설명하는 주장이 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도 있다”이다.
여기에 책상이 ‘있다.’ 우리는 책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책상 옆에 의자가 ‘있다’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책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 말처럼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이 없다면 책상은 있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이 ‘없다’면 책상 등 구체적 사물은 있을 수 없다.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도 ‘있어’야 사물은 존재할 수 있다. 책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책상이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공간─ 사무실이라고 하자 ─에 책상이 있다는 것은 책상이 차지하지 않는 공간이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책상은 책상이 아닌 한계, 경계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없는 것’이 ‘있어야’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와 무의 통일이다. 존재와 무는 상호 배척하고 부정하는 속성이지만 ‘무’가 있어야 ‘존재’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제에서 A=not A이다라는 변증법적 사고가 탄생한다.
만약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정말로 없다면, 이 세상의 구체적인 사물들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 변화란 지금 ‘있는 것’이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것, 즉 지금의 형태가 ‘없어지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런데 없는 것이 정말 없다면, 변화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땅에 씨앗 하나를 심는다고 해 보자. 씨앗은 싹을 틔우기 위해 껍질을 깨고 썩어야 한다. 씨앗이 씨앗으로서 ‘있음’을 유지하는 한, 결코 싹이 될 수 없다. 씨앗이 새로운 존재(싹, 나무)로 자라나려면 씨앗 자신이 ‘없어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것은 씨앗 안에 이미 자신을 부정하는 힘, 즉 ‘없어짐(無)’의 계기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씨앗의 존재 속에 싹의 씨앗이, 그리고 씨앗 자신의 소멸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도 그렇다. 삶은 서서히 죽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살아 있다는 존재 속에 죽음이라는 ‘없어짐’이 내재해 있다. 무(無)는 존재를 바깥에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운동과 변화의 비밀이다. 사물이 변화하는 것은 그 속에 자신을 부정하는 힘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존재와 무의 통일을 ‘생성(Werden)’이라고 불렀다. 결국, 이렇게 된다.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변화하려면, ‘없는 것’이 그 안에 함께해야 한다. 존재는 무(無)와의 모순적 통일 속에서만 살아 움직인다. 이것이 ‘존재와 무의 통일’이며, 여기서 변증법의 씨앗이 싹튼다. 세계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고정된 대립이 아니라, 이 둘의 모순적 통일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고 발전한다. 결국, 형식논리로는 존재원리도 설명할 수 없고 더욱이 존재의 변화원리도 설명할 수 없지만, 변증법은 존재원리와 존재의 변화원리를 다 설명한다. 헤겔이 자신의 ≪논리학≫을 존재와 무의 문제에서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와 무의 문제는 무엇을 해명하고, 무엇을 해명하지 못하는가? 유와 무의 문제는 세계가 존재하게 되는 원리를 설명하고, 세계의 운동ㆍ생성ㆍ창조ㆍ발전의 원리를 해명한다. 사물이 왜 변화하는가, 새것은 어디서 오는가, 발전은 어떻게 가능한가 ― 이 모든 물음에 유와 무의 변증법이 답한다. 그러나 유와 무의 문제만으로는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세계를 인식하는 ‘나(의식)’와 인식되는 ‘세계(물질)’ 사이의 관계다. 세계가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의식이 먼저인가, 물질이 먼저인가? 이 물음이 철학의 근본문제를 두 번째 층위로 이끈다.
3. 두 번째 층위: 생각이 먼저인가, 세계가 먼저인가 ― 인식론의 근본문제
근대에 들어 인간은 자연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변혁하기 시작했다. 과학혁명이 일어났고, 인간 이성(理性)의 힘에 대한 자신감이 폭발했다. 이 시대에 철학의 근본문제는 새롭고 더 명료한 형태로 제기된다. ‘세계를 인식하는 나(주관)와 인식되는 세계(객관) 중 무엇이 더 근본적인가?’ 엥겔스는 이것을 ‘사유와 존재의 관계 문제’, 즉 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로 정식화했다. 이것이 바로 엥겔스가 ‘철학의 근본문제’라 명명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선차성(先次性)의 문제다. 물질이 먼저인가, 의식이 먼저인가? 관념론은 의식이 먼저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세계도 없다’ 유물론은 물질이 먼저라고 한다. ‘세계는 내가 생각하든 안 하든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둘째는 인식 가능성(認識 可能性)의 문제, 즉 진리의 문제다. 우리는 세계를 올바르게 알 수 있는가? 우리의 의식 속 이미지가 실제 세계와 일치한다고 확인할 수 있는가?
이 두 물음은 유와 무의 변증법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유와 무의 문제는 세계 자체의 운동 원리를 다루지, 그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다루지 않는다. 사물이 끊임없이 생성ㆍ변화ㆍ발전한다는 것을 안다 해도, 그 앎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그 앎의 주체인 의식이 세계(물질)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별도의 물음이다. 그래서 물질과 의식의 문제는 인식론의 근본문제로 별도의 독립적인 지위를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근대 철학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며 생각하는 주관(나)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순간, 문제가 생긴다. 내 머릿속의 생각(의식)과 바깥 세계(물질), 이 둘을 도대체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사과를 본다. 내 눈에 들어온 사과의 이미지(의식 속의 사과)와 실제로 저기 놓인 사과(바깥 세계의 사과)가 일치하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 사과를 다시 보면 또 ‘의식 속의 사과’가 될 뿐이다. 결국, 의식은 의식 바깥으로 나갈 방법이 없다. 이것이 근대 철학의 딜레마다. 이 딜레마는 ‘진리란 불가능하다’는 절망적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막힌 문을 연 사람이 바로 맑스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2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즉 그의 사유의 현실성과 위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실천(Praxis)이 해답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순수한 머릿속 사유가 아니다. 수영을 ‘안다’는 것은 물속에서 실제로 팔다리를 움직여 나아가는 것이다. 즉, 수영을 할 줄 안다는 의미이다. 철에 대한 지식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그 지식으로 실제로 철을 가공해 도구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로 증명된다. 인식과 대상이 일치하지 않으면 실천은 실패한다. 실천의 성공이 바로 인식과 세계의 일치, 즉 진리의 증명이다.
이렇게 맑스는 실천 개념을 통해 근대 철학의 딜레마를 돌파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결정적인 물음에 부딪힌다. 의식과 물질을 통일하는 실천의 주체는 누구인가? 주의할 점은 ‘의식’이 별도로 존재하고 ‘물질’이 별도로 존재한 뒤 그 둘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천은 살아있는 인간이 수행한다. 그리고 그 인간은 물질이지만, 의식을 가진 물질이다. 그렇다면 물질과 의식은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어떻게 통일되는가? 이 물음이 세 번째 층위를 이끈다.
이 지점에서 물질과 의식의 문제가 갖는 또 하나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 문제는 선차성과 인식 가능성을 해명하지만, 세계가 어떻게 운동하고 변화하며, 그 변화의 주체는 누구인가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다. 세계가 물질임을 알고,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음을 알아도, 그것만으로는 인간이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가라는 실천의 철학적 기초를 세울 수 없다. 그래서 유와 무의 변증법(운동ㆍ변화ㆍ발전의 원리)과 물질ㆍ의식의 유물론(선차성과 진리의 원리), 이 두 문제가 모두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두 문제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 문제 속에서 비로소 하나로 통일된다.
4. 두 근본문제는 왜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
잠시 멈추어 이 점을 더 분명히 해 두자. 유와 무의 문제(변증법)와 물질ㆍ의식의 문제(유물론)는 각각 무엇을 담당하고, 왜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
유와 무의 문제만으로는 부족하다. 세계가 유와 무의 통일로 존재한다는 존재 원리와 세계가 끊임없이 운동하고, 사물 속에 자기부정의 씨앗이 내재해 있다는 변증법의 원리를 안다고 해도, 그 세계를 인식하는 의식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변화의 법칙으로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인지, 아니면 우리 머릿속의 환상인지 판별할 기준이 없다. 또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신의 섭리인지, 자연의 맹목적 힘인지, 아니면 인간의 의식적 실천인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물질과 의식의 문제만으로는 부족하다. 물질이 의식보다 선차적임을 알고, 실천을 통해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음을 안다 해도, 세계가 어떻게 운동하는지, 변화는 어디서 오는지, 새로운 것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이 문제는 직접 다루지 않는다. 선차성과 진리의 문제가 해명되더라도, 변화와 발전의 원리가 없으면 세계는 고정되고 정태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따라서 변증법(유와 무)은 세계의 운동ㆍ생성ㆍ창조ㆍ발전의 원리를 제공하고, 유물론(물질과 의식)은 그 운동하는 세계가 의식보다 근본적이며 우리가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변혁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ㆍ존재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 두 원리가 결합될 때 비로소 완전한 세계관이 성립한다. 그리고 이 결합은 추상적인 논리의 접합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실천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5. 세 번째 층위: 인간 존재 속에서 물질과 의식은 어떻게 통일되는가 ― 인간과 세계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소들은 모두 이 지구와 우주에서 왔으며, 우리는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늙으면 죽는다. 이것이 자연의 필연성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철저히 물질적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연을 넘어서는 존재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내일’과 ‘미래’를 그린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 투쟁한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이며, 자아의식이다. 아직까지 이 지구에서 자아의식을 가진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인간 안에서 ‘물질적 몸’과 ‘의식’은 어떻게 공존하는가? 관념론은 의식이 몸을 지배하며, 몸은 의식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한다. 기계론적 유물론은 의식이란 뇌의 작용에 불과하며, 따라서 인간도 정교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대답은 모두 인간을 물질과 의식으로 분리시킨다. 관념론은 의식만 남기고, 기계론은 물질만 남긴다.
맑스주의의 대답은 다르다. 인간 안에서 물질과 의식은 서로 대립하는 두 실체가 아니라, 실천 속에서 통일된 하나의 살아있는 과정이다. 의식은 물질세계에서 생겨나고(물질의 산물), 그 의식은 다시 물질세계를 변혁한다(의식의 능동성). 이 두 방향의 운동이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인간은 물질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변혁하는 과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은 ‘인간의 의식’이다. 철학에서 의식과 물질을 추상적으로 대립시킬 때, 우리는 종종 의식이 마치 몸과 분리된 어떤 독립적 실체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의식은 언제나 특정한 뇌와 신경계를 가진 살아있는 인간의 의식이다. 굶주린 사람의 뇌는 다르게 생각하고, 착취당하는 몸은 다르게 느낀다. 물질적 조건이 의식의 내용과 형태를 규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의식은 단순히 물질 조건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다. 의식은 목적을 세우고, 계획을 짜고, 집단을 조직하여 물질 조건 자체를 바꾸어 낸다.
이 통일의 열쇠가 바로 인간이 물질 가운데 가장 발달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돌멩이도 물질이고, 동물도 물질이다. 그러나 돌멩이는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동물은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변혁하지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물질의 운동 법칙을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그 법칙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활용한다. 이것은 인간이 물질의 법칙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 그 자체가 인간이라는 형태로 발전하여, 스스로를 의식하고 스스로를 변혁하는 힘을 획득했다는 뜻이다. 인간은 물질 운동의 주동적(主動的) 존재다. 즉, 물질의 운동이 인간의 의식적 실천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능동적으로 실현한다.
이 점에서 인간과 세계의 문제는 앞선 두 층위를 구체적으로 통일한다. 세계는 유와 무의 변증법에 따라 운동하고 변화한다. 그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은 실천을 통해 그것을 인식하고 변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은 단순히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라, 물질세계 안에서 의식적이고 목적의식적인 실천을 수행하는 주동적 주체다.
인간은 자연의 필연성 속에 있으면서도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이 모순, 즉 필연과 자유의 긴장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 구조이다. 이것이 세 번째 층위, ‘인간과 세계의 관계 문제’의 핵심이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 문제는 인간이 세계를 변혁할 수 있다는 해답을 준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 문제 앞에 두 가지 잘못된 태도가 있다. 하나는 ‘어차피 세계는 정해진 법칙대로 움직이니 인간이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숙명론이다. 다른 하나는 ‘의지만 있으면 뭐든 바꿀 수 있다’는 관념적 주의주의(主意主義)다. 숙명론은 필연에만 매몰되고, 주의주의는 자유를 추상화한다. 둘 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천에서 벗어난다.
맑스주의의 대답은 다르다. 자유(인간)와 필연(자연)은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규정한다. 세계의 법칙(필연)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법칙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활용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이자 실천이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는 필연성의 인식이다.”
이 말은 ‘세계의 법칙을 알면 자유롭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법칙을 알고, 그 법칙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활용하는 것이 자유라는 뜻이다. 예컨대, 중력의 법칙을 모르면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 그러나 중력의 법칙을 알고 비행기를 만들면 하늘을 날 수 있다. 법칙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을 이용하는 것이 자유다.
노동자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는 자본주의라는 구조적 필연 속에 놓여 있다. 자본은 이윤을 추구하고, 노동자는 임금을 받는다. 이 관계는 개인의 의지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 필연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위에서 실천할 수 있다.
1987년 이전, 한국의 노동자들은 ‘산업전사’라는 미명하에 무권리 상태의 병사처럼 살아야 했다. 자본과 독재 권력은 “국가 경제를 위해 희생하라”며 노동자의 입을 막았고, 어용 노조는 노동자의 손발을 묶어두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이를 바꿀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겼다.
그러나 87년 7월에서 9월, 울산에서 시작되어 전 국토를 휩쓴 노동자 대투쟁은 그 숙명론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노동자들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공장의 담장을 넘었고, 자본의 철저한 위계와 법적 억압이라는 필연성을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옥죄던 독점자본의 지배 구조를 비로소 ‘인식’했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민주노조 건설’이라는 실천에 나섰다.
수천 개의 노조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 장엄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부속품이 아니라, 자신들의 단결된 힘으로 생산 현장과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역사의 주역임을 스스로 확인했다.
이것이 바로 ‘필연성의 인식을 통한 자유의 확장’이다. 이것이 물질의 가장 발달한 형태인 인간이 자신의 의식적 실천으로 물질세계를 주동적으로 변혁하는 방식이다. 87년 대투쟁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물질적 벽을 인식하고, 그 벽을 허물어뜨리는 실천을 통해 노동계급이 쟁취한 실질적 자유의 기록이다.
6. 세 층위의 유기적 관계: 변증법적 유물론의 논리 구조
이제 세 층위가 어떤 논리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유기적으로 통일하는지 정리해 보자.
유(有)와 무(無)의 문제 → 존재론(변증법)의 근본문제
세계의 모든 사물은 자신 속에 ‘없어짐(無)’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하고 변화한다. 이것이 변증법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다. 이 원리는 자연에도, 사회에도, 사유에도, 인간의 역사에도 동등하게 관철된다. 변증법은 세계를 고정된 것의 집합이 아니라, 모순의 통일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ㆍ발전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이 운동하는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보증하지 못한다. 변증법에게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유물론이다.
물질과 의식의 문제 → 인식론(유물론)의 근본문제
세계는 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다. 의식은 물질의 산물이며, 고도로 조직된 물질(뇌)의 기능이다. 그리고 인간은 실천을 통해 이 물질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유물론의 토대이자 진리론의 기초다. 그러나 유물론은 물질의 선차성과 인식 가능성을 해명하지만, 그 물질세계가 어떻게 운동하고 변화하는지의 원리 자체는 직접 제공하지 않는다.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제공하는 것이 변증법이다.
인간과 세계의 문제 → 실천의 지반, 두 근본문제의 통일
물질세계가 변증법적으로 운동하고(변증법), 그 세계는 의식보다 선차적이며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변혁할 수 있다(유물론). 그러나 이 두 원리가 구체적으로 통일되는 장소는 어디인가? 바로 인간의 실천이다. 인간은 물질이다. 동시에 인간은 의식을 가진 물질, 즉 물질 가운데 가장 발달한 존재이다. 인간 안에서 물질과 의식은 실천이라는 형태로 살아있는 통일을 이룬다. 인간은 물질세계의 변증법적 운동 법칙을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그 위에서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변혁한다. 이것이 인간이 물질 운동의 주동적 존재가 되는 방식이다. 유물론과 변증법이 여기서 실천을 통해 하나로 살아 숨 쉰다.
이 세 층위가 실천을 통해 통일되어 완성된 것이 바로 맑스주의 철학,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노동자의 삶 속에서 이 통일을 확인해 보자. 어느 날, 공장에서 일하던 A씨는 동료가 기계에 끼여 다치는 사고를 목격했다. 그는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의식이 물질적 현실을 반영― 유물론). 조사를 해 보니, 안전장치를 떼어낸 것은 자본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존재 속의 무― 착취 구조에 내재한 모순, 변증법). A씨는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고, 안전기준을 요구하는 투쟁을 시작했다(인간이 필연을 인식하고 자유를 실현하는 주동적 실천― 인간과 세계의 통일). 이 과정에서 A씨는 단순한 ‘피고용인’에서 ‘계급적 주체’로 변화했다. 그의 인식은 실천으로, 실천은 다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이 살아 숨 쉬는 방식이다.
7. 우리에게 철학의 근본문제가 왜 중요한가 ―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철학의 근본문제가 왜 노동자에게 중요한가? 이것은 상아탑의 한가한 논쟁이 아니다. 우리의 투쟁 전략과 직접 연결된다. 나침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듯, 철학의 근본문제는 우리가 운동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
물질과 의식 문제가 왜 중요한가? ‘세상이 바뀌려면 먼저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는가, 아니면 현실적 조건(물질적 기반)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운동 전략이 달라진다. ‘사람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교육과 설득에만 매달릴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증명한다. 의식은 실천 속에서, 투쟁 속에서 바뀐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 대부분의 노동자는 ‘노조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쟁을 통해, 그들은 ‘노조는 우리의 생명줄’이라고 외치게 되었다.
존재와 무의 통일이 왜 중요한가?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씨앗이 자신을 부정하며 싹을 틔우듯, 모든 존재는 자신 속에 부정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 속에서 자라나는 모순, 즉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바로 변화의 동력이다. ‘자본주의는 영원하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개선책만 찾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 여성 노동자 투쟁, 기후정의 투쟁―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왜 중요한가? ‘나 하나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패배감과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낭만적 착각을 동시에 넘어서려면, 인간이 물질 가운데 가장 발달한 의식적 존재로서 세계의 주동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전태일은 혼자였지만, 그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을 깨웠다. 그의 실천은 필연(자본주의적 착취 구조)을 인식한 위에서 자유를 실현하는 행위였다. 당신의 실천은 결코 헛되지 않다.
결국, 철학의 근본문제는 이 하나의 물음으로 귀결된다. ‘인간은 이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자신의 힘으로 변혁할 수 있는가?’ 맑스주의 철학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렇다. 그 힘은 오직 조직된 노동계급의 실천 속에서만 자라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근거를 이론적으로 해명한 것이 바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탐구다. 변증법(유와 무)이 변화의 원리를 제공하고, 유물론(물질과 의식)이 그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하며, 인간과 세계의 실천적 통일이 그 둘을 하나로 살아 움직이게 한다. 이 세 겹의 논리적 통일 위에 맑스주의 철학이 서 있다.
(이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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