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신좌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


본문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1. 들어가며: 신좌파 극복의 필요성
1. 사전적 의미에서 신좌파는 1960년대 서유럽과 북미에서 비판이론⋅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좌파 조류다. 신좌파는“계급투쟁과 노동운동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좌파와 달리 다문화주의, 동물권, 여성주의, 성소수자 운동, 환경 운동, 기타 소외 계층에 대한 인권 신장 운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전통적 맑스주의의 계급투쟁이론 및 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구좌파에서 중시하던 자본주의, 제국주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나 미시적 불평등과 일상의 권위주의, 인간 소외 등에 주로 관심을” 둔다. (주1.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A2%8C%ED%8C%8C)
독일 위키백과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유로코뮤니즘, 녹색당, 자율주의, 마오주의 중심의 군소 원외 조직들인 K-그룹들 등만 아니라, 극좌 테러리즘 성향의 혁명세포(RZ), 그로부터 파생된 좌파 근본주의 페미니스트 그룹 Rote Zora, 반제 공산주의 도시게릴라를 자처하는 적군파(RAF) 등도 신좌파에 포함된다. 이들 운동은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 평의회 민주주의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등 맑스주의 계열의 사상 내지 무정부주의에 뿌리를 두기도 한다. (주2. https://de.wikipedia.org/wiki/Neue_Linke)
2. 이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은 대체로 현실사회주의 국가들 및 맑스-레닌주의 당 중심의 사회주의 운동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런 경향은 20세기 서유럽과 북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진보지향적 운동들 곳곳에는 다양한 신좌파적 요소들이 깊숙이 스며들어와 있다. 시민운동만 아니라 노동운동도 신좌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 긍정적 효과도 없지 않다. 예컨대 운동 내부의 민주성 내지 자발성이 부분적⋅표면적으로 늘어난 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시적⋅본질적으로는 부정적 효과가 압도적이다. 부정적 효과의 요체는 반-노동중심주의를 일반화하여 자본독재 극복 운동의 뼈대를 허물고, 자본독재의 부작용들을 완화하는 미세한 개선들로 자본독재의 영속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조차 형해화된 점, 즉 몇 년에 한 번씩 행사하는 투표권조차 자본독재의 주요 분파들 사이에서 차악을 골라야 하는 상황이 고착되고 있다는 점이 그 증거다.
3. 신좌파 이론들이 널리 퍼진 데에는 물적 조건이 있었다. 극심한 양극화 및 야만적 서열구조를 무색하게 만든 경제성장, 상층부 노동자 내지 이데올로그들을 상대로 한 매수효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의식을 규정한다’ (주3. K. 맑스: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1859년 서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2>>,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2, 478쪽 참조)는 원론은 변함없이 작동해 온 것이다. 신좌파를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역시 사회적 존재 내지 물적 조건에 근거한다. 현재의 자본독재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대량 실업, 제국주의 전쟁, 환경재앙 등 범인류적 문명 파괴의 위험이 자본독재의 테두리 안에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이제 그 극복의 필요성은 신좌파가 성장하던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절박해졌다는 사실이 그러한 조건이다. 신좌파 극복은 이러한 변화에 적극 대응함으로써, 즉 위기의 절박성에 부응하여 새로운 사회적 물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의식적 조직적 운동을 통해 가능하다. 이때 ‘사회적 존재’는 살아있는 의식과 의식의 산물들을 포함한다는 점, 따라서 의식의 변화가 사회적 존재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 전제된다. 이 점을 인정하고 사회적 조건을 바꿔나가려는 의식적 운동은 과학적 인식을 건너뛰려는 주의주의나 관념론과 무관하다. 물론 현재의 물적 조건 내지 사회적 힘관계를 불변의 조건으로 상정하는 숙명론과도 대립한다. 오히려 변혁주체의 역량을 최대한 발현시키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2. 청산주의
1. 현실사회주의 국가와 맑스-레닌주의 당 중심의 변혁운동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인해, 신좌파에는 청산주의적 경향이 따른다. 신좌파 이데올로그들은 대체로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평가를 기피한다. 제국주의에 맞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과도단계의 난관들을 도외시하고, 자기 나름의 이상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관념에 근거해 현실사회주의가 사회주의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으로 곧장 달려간다. 그리고 현실사회주의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일 것과 비판하고 거부할 것을 분석⋅평가⋅종합하기보다, 일괄하여 거부하기를 선호한다. 이런 지적 풍토는 특히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서구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사회에도 널리 자리 잡아 왔다.
신좌파의 청산주의적 편향은 그 주요 이데올로그들에게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체제가 아직 엄존하던 시기에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는 변증법에서 사태 자체와 내재비판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동구의 공식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서는 내재비판을 포기하고, 그것이 개념의 노고를 기울이지 않고 ‘프로파간다를 위한 사기’로 전락했다고 단정한다. 즉 여기서 변증법은 “비판적 이론이기를 그만두었으며, 단순한 기계적 포괄작업으로 몰락”했다는 것이다.(주4. Th.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21, 90쪽. 이러한 비난은 아도르노의 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하 ‘입문’으로 약칭.)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대표 이데올로그인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말과 함께 단절론을 유행시켰을 뿐 아니라, 유물변증법을 내세우면서도 맑스의 이론에서 부정의 부정⋅지양⋅소외 등 헤겔 변증법의 주요 개념들을 지워버리려고 애쓴다.(주5. L.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65쪽 이하 참조. 이하 ‘위하여’로 약칭.) 그는 현란한 수사법을 구사하여, 헤겔주의를 지탄받아 마땅한 경제주의⋅환원주의⋅본질론⋅목적론 등의 원흉으로, 스탈린은 인민을 탄압한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알튀세르의 제자 랑시에르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역설하면서도, 평등과 민주주의를 위한 인류사적 해방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던 현실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침묵으로 일관한다.(주6.‘문학의 정치’라는 제목만 보면 제법 기대되는 저술에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주의와 리얼리즘의 투쟁 전통은 존재한 적도 없는 듯이, 루카치라면 자연주의라고 비판했을 평준화 논리를 민주주의의 원리처럼 제시한다. J.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유재홍 역, 인간사랑 2011 참조.)
2. 청산주의의 극복은 청산주의의 답습으로, 즉 신좌파에 대한 일괄적 거부로 가능하지 않다. 예컨대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본질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라고 규정하면서 노동자정치운동에 등을 돌린다. 물질적 풍요와 문화산업의 산물들을 이용한 의식⋅감각⋅욕구의 조작을 통해 노동자들 자신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지배받기를 스스로 원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이들의 현재 의식과 욕구는 지배관계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므로, 노동자계급을 변혁의 주체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관리되는 사회’개념의 요지다.(주7. 이러한 주장의 뿌리로 신좌파의 원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맑스와 엥겔스의 원론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리되는 사회’ 개념은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담긴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관계를 총체적이고 일방적인 지배관계로 과장하는 점에서 맑스주의에서 멀어진다.)
이와 관련해, 적대적 모순들이 수시로 가시화되는 한국 사회는 ‘관리되는 사회’와 거리가 멀며, 따라서 그런 주장은 현실진단으로서는 과장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본주의의 적대적 근본모순을 흐려놓으며 노동자민중의 변혁적 잠재력을 폄하한다고 비판하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까다로운 논의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다수의 노동자민중이 자본독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본가들을 지지하고 걱정해주며 노동자정치⋅노동자당⋅노동자국가를 꿈조차 꾸지 않는 것도 한국 사회의 주요 현상이다. 이 점에서‘관리되는 사회’라는 문제의식을 경멸하고 묵살한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자본독재 이데올로그들은 흔히 현실사회주의운동의 역사적 패배를 근거삼아 노동자정치⋅노동자국가의 불가능성 내지 불필요성을 선전하고 이로써 다시 노동자정치운동의 열악한 조건을 더욱 악화시키는 절망의 순환논리를 유포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회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된 ‘관리되는 사회’의 지배 양상이 자명한 불변의 근거로 전제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3. 이 악성 순환논리를 깨는 데에는 ‘관리되는 사회’를 현실성 있는 개념으로 만들어준 제국주의적 물적 토대의 가변성 및 취약성, 그리고 공멸이 아닌 공존과 공영을 위한 자본독재 극복의 불가피성을 명확히 인식하고,(주8. 이러한 인식을 위해서는 어떤 신좌파이론도 <<자본론>>과 <<제국주의론>>을 아직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못했고, 단지 그 빈틈들을 조금씩 채워줄 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조직적 체계적 활동을 통해 이 인식을 대중적으로 공유하는 일이 그 첫걸음일 것이다. 인식의 대중적 공유를 위해서는 매체와 교육체계의 적극적 활용이 중요함은 자명하다.(주9. 이는 이론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현실적 힘이 된다는 원론적인 생각이기도 하지만,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신좌파의 입장을 일정하게 흡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대중적으로 더욱 설득력 있는 인식을 생산하는 데에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외면하는 청산주의보다, 그것을 면밀히 검토하고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그 한계와 해악 혹은 유효한 의미 등을 밝히고 대안 생산의 재료로 활용하며 지양하는 내재비판적 사고방식, 즉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인 변증법적 사고방식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방식은‘과잉결정’이나 ‘차이의 긍정’, ‘반-환원론’, ‘탈-중심주의’등 여타의 신좌파적 문제의식들 내지 지향 이념들을 다룰 때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반-권위주의
1. 청산주의가 주로 신좌파의 무의식적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데에 반해, 반-권위주의⋅반-환원론⋅탈-중심주의 등은 의식적 공격수단으로 쓰인다. 물론 공격과 방어는 늘 함께 작용한다. 공격의 강세가 자본독재보다는 당중심의 노동자정치와 노동자국가에 있다는 점에서 반권위주의 등은 청산주의의 앞면이라고 할 수 있다. 반권위주의의 뿌리는 맑스 시대의 무정부주의부터, 레닌의 전위 노선에 맞서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한 룩셈부르크주의, 일상 속의 권위주의를 광범하게 비판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등 다양한 흐름에서 찾을 수 있다.
제1인터내셔널 시기 맑스는 ‘계급들의 평등화’나 ‘정치 문제의 완전한 회피’를 표방하는 바쿠닌 종파와 ‘공개적이고도 멈출 줄 모르는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주10. K. 맑스/ F. 엥겔스: 「인터내셔널의 이른바 분열: 국제 노동자 협회 총평의회의 기밀 회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4>>, 이수흔 역, 박종철출판사 2007, 108쪽 이하 참조.) 맑스를 중심으로 한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에 ‘권위주의’라는 비난을 퍼부으며 끊임없이 종파적 이권을 위해 투쟁을 벌인 무정부주의야말로 제1인터내셔널 해체의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이들 반권위주의자들, 즉 무정부주의자들에 맞서는 엥겔스의 논박은 눈여겨볼 필요 있다. “반권위주의자들은, 권위적인 정치적 국가가 생겨나게 되는 사회적 조건을 무너뜨리기에 앞서 그러한 국가는 일격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회 혁명의 첫 번째 행위가 권위의 폐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양반들은 혁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말인가? 분명히 혁명은 존재하는 가장 권위적인 것이다; 그것은 인구의 일부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권위적인 수단인 소총, 총검, 대포로 또 다른 일부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행위이다. 승리한 당파는, 싸운 것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자신들의 무기가 반동배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통해 이 지배를 지속시켜야만 한다. 파리코뮌이 무장한 인민들의 이러한 권위를 부르주아지에 맞서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단 하루라도 버틸 수 있었겠는가?”(주11. F. 엥겔스: 「권위에 관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4>>, 이경일 역, 박종철출판사 2007, 278쪽.)
엥겔스는 파리코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규정하지만, 그를 권위주의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엥겔스와 같은 취지로 맑스도 파리코뮌을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의 착취계급에 대한 투쟁의 성과였으며, 노동에 대한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질, 궁극적으로 발견된 정부 형태”(주12. 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 이종훈 역, 소나무 1993, 347쪽. 이하 ‘내전’으로 약칭.)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그 역시 권위주의와 거리가 있다. 엥겔스는 파리코뮌의 주요 특징으로서 ‘국가와 국가 기관들이 사회의 종복으로부터 사회의 주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막을‘절대 확실한 방책’을 강구했다는 점을 지적한다.(주13. F. 엥겔스: 「1891년 서문」, K. 맑스: 「프랑스 내전」, 같은 책, 296쪽.) 맑스는 파리코뮌이 “사회의 자유로운 운동을 희생시켜 생존하고 또한 이를 방해하는 국가라는 기생충에 의하여 여태까지 흡수된 모든 힘을 사회 조직체에 복귀시켜 주었을 것”이라고 본다.(내전346) 이로써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질적 민주주의 혹은 근본 민주주의를 통해 무정부주의의 문제의식을 흡수하는 대안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2. 룩셈부르크는 레닌의 중앙집중주의에 원론적인 비판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중앙집중주의의 특징은 모두를 위해 혼자 사고하고, 결정하고 지도하는 당 중앙에 모든 당기관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조직의 핵심과 주변인물을 엄격히 구별하는 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룩셈부르크는 레닌주의가 노동자대중의 사회주의운동에 블랑키주의의 조직원리를 이식한다는 혐의를 제기하며, 무엇보다 중앙집권주의로 인해 ‘권위주의적 당중앙위원회의 권능’속에서 선진 노동자들의 ‘자생적 투쟁⋅창의성⋅정치감각의 발전’이 저해될 것을 우려한다.(주14. R.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주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저작집>>, 편집부 역, 도서출판 풀무질 2002, 138쪽 참조.) 이에 대해 레닌은 룩셈부르크가 러시아의 구체적 사실들을 모르는 데에 기인하는 탁상공론이라고 응수한다. (주15. V. I. 레닌: 「레닌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보내는 회답」, <<룩셈부르크주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저작집>>, 같은 책, 331쪽.)
러시아혁명 직후 룩셈부르크는 혁명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레닌과 트로츠키를 겨냥해 프롤레타리아독재는 “가장 활동적이고 무제한적인 인민대중의 참여가 보장된 토대 위에서, 또한 제약 없는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실행가능한 형태의 계급독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로자302) 인민대중의 무제한적 참여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을 때 초래될 결과를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예상한다. “공공생활은 점차 동면에 들어가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네르기와 무한한 경험을 지닌 소수 당 지도자들만이 명령하고 지배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그중에서도 몇몇 탁월한 당 지도자가 전권을 행사할 것이며, 노동자계급의 엘리트들은 가끔 회의에 초대되어 당 지도자의 연설에 박수를 치고, 이미 결론이 내려진 제안을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들러리가 될 뿐이다.”(로자297)
룩셈부르크의 문제 제기는 혁명과 프롤레타리아독재 시기의 난관들에 비춰볼 때 다분히 현실성이 없다. ‘제약 없는 민주주의’라는 요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가 압도적으로 안정화된 단계 혹은 높은 단계의 공산사회에서 비로소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빈곤을 통한 위협과 광범한 매수가 엄존하고 언론을 통한 여론조작이 일상화된 자본독재 속에서 언론의 자유는 실질적으로 자본독재의 지배를 위한 자유로 전락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노동자대중의 자생성 혹은 자발성도 이미 자본독재의 부속품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객관적 내용에 대한 비판과, 자발적 의식⋅감각⋅욕망구조의 재구성이 요구된다.(주16. 스피박은 ‘욕망의 재배치’를, 랑시에르는 ‘감각의 재분할’을 표방한다. 이때 욕망 및 감각의 재배치나 재분할은 의식의 변화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작동해야 할 것이다.) 자본독재를 넘어서기 위한 의식과 자발성이 결합된 ‘의식적 자발성’을 대중적으로 형성하는 일이 노동자국가 건설 과정에서만 아니라 그 이후의 제국주의를 상대로 하는 전쟁 기간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룩셈부르크의 비판은 당 중심의 노동자정치운동이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할 문제들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레닌은 당 규율의 권위가 무제한적 권한 따위에서 생긴다고 보지 않는다. 그 조건으로 레닌은 전위의 의식성과 혁명에 대한 헌신, 노동자민중과 융합할 수 있는 능력, 정치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 그리고 이 올바름에 대한 대중의 인정 등을 지적한다. “이들 조건의 창출은 올바른 혁명이론에 의해 촉진되며, 역으로 이 혁명이론은 도그마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대중적인,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과 밀접히 연관될 때에만 완전히 나타나게 된다.”(주17. 1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게 1995, 19쪽.) 이때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이면서도 당과 전위의 현실적 의미를 충분히 살려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어떤 정치조직이나 정당운동을 직접 대변하지 않았지만, 대학가를 중심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68운동 시기에 독일과 미국에서 그들이 학생들에게 끼친 영향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를 결합하고자 한 라이히의 연구와, 권위주의적 성격에 대한 프롬의 1930년대 정신분석학적 사회학적 연구를 발판으로, 1940년대에 아도르노 등은 반민주적 권위주의적 성격 수준을 경험주의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F-척도라는 설문 도구를 만든다. F는 파시즘을 의미한다. 그 주요 항목들은 관습주의, 권위주의적 복종과 공격, 내면적 정서적 측면 및 자아비판에 대한 거부, 미신과 고정관념, 사회적 약자를 향한 파괴적 성격과 냉소주의, 강력한 권력과 자신의 동일시 등이다. 그들은 이러한 척도를 통해 권위주의적 성격과 반유대주의, 민족 중심주의, 경제적 보수주의 등의 연관을 확인한다. 이 척도는 우파만 아니라 극좌파적 성격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주18. https://de.wikipedia.org/wiki/Autorit%C3%A4re_Pers%C3%B6nlichkeit)
권위주의 비판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이론에도 스며들어 있다. 변증법에서 특히 불변의 형이상학적 제일원리나 확고한 방법론과 고정적인 분류법을 거부하고, 완결된 체계와 변증법의 긍정성을 불신하며, 개념의 운동과 반성적 비판적 사유를 강조하는 점 등은 권위주의 비판과 명백히 친화적이다. 이 점에서 그는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 디아마트에 대한 그의 비판도 동일한 맥락 속에 있다. ‘진리는 전체’임을 주장하는 헤겔의 관념론과 제일원리를 거부하면서 그가 유물론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짜임관계(Konstellation) 개념은 탈-위계적, 탈-중심적 사고로 이어진다. 즉 사고들의 관계가 제일원리로부터 파생되는 위계관계가 아니라 짜임관계일 때, ‘모든 사고는 중심과 같은 거리에’ 있으며, 모든 개별 명제가 ‘반성적 사고의 힘’과 ‘사태 자체를 포착하는 정확성의 힘’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 ‘모든 말, 모든 명제, 모든 구문적 틀이 다른 것들과 똑같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 철학에서는 ‘사유에 의해 충족될 수는 없지만, 이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입문361)
이러한 탈-중심적, 탈-위계적 사고는 그의 사후에 범람하는 해체론의 수문을 열어놓는 듯하다. 또 이때 모든 개별 명제들의 인식적 힘과 책임이 같아지는 것을 이상으로 보는 데에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근본문제인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을 중심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문제들과 대등한 수준으로 평준화함으로써, 그 극복의 구체적 방법과 전망을 만들기 어렵다고 비판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양비론을 통해 아도르노는 총체적 지배와 파국에 직면한 현실 너머의 어떤 다른상태(das Andere)에 대한 추상적 기대를 부추긴다. 이는 자본독재체제 내부 개량과 민주화의 이면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변증법 논의에서 그는 여전히 현실변화와 인식기관으로서 모순의 중심적인 의미를 인정하며, 개념의 운동⋅내재비판⋅추상과 구체⋅사유의 객관성 등 주요 문제들에서 헤겔 변증법과 맑스 변증법의 연관과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 준다. 이 점에서 그는 엥겔스와 레닌의 변증법 이론을 여러 측면에서 좀 더 구체화한다고 볼 수 있다.(주19. 주체와 객체를 엄격히 구분하는 레닌의 인식론에 아도르노는 동의하지 않는다. 레닌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쓴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루카치는 그러한 구분을 사물화된 부르주아적 의식의 산물로 보았으나, 레닌주의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주체와 독립해 있는 객체’라는 레닌의 공식을 말년까지도 그대로 사용한다. 반면에 아도르노는 루카치의 사물화 개념을 적극 수용하며, 주체와 객체의 매개상태에 주목한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일괄해서 청산하기보다 분석적으로 면밀히 읽으면서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반성적 사유에 대한 그의 과도한 요구를 시의적절하게 중단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그는‘진리의 시간적 핵’이라는 개념으로 이 중단의 필요성 내지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입문36) 레닌이 ‘헤겔의 관념론이라는 두엄더미’ 속에서 ‘변증법이라는 보물’을 찾아냈듯이,(주20. V. I.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정광희 역, 아침 1988, 259쪽 참조.) 아도르노의 변증법 이론에서도 수시로 분출하는 불편한 언사들 사이에서 직접 활용하거나 변형하여 재활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는 일은 비교적 생산성 있어 보인다. (이어서 계속)

△ 강의영상은 2024.5.25(토) 13시, 민주노총 12층 회의실, <<현장과광장]>> 제10호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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