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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신좌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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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신문
2025-04-22 22:00 18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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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이어서...)


4. 반-환원주의


1. 탈-중심주의⋅탈-위계주의의 유행병과 함께 반-노동중심주의가 범사회적으로 고착되어오는 과정에서 알튀세르의 과잉결정론은 양가적 기능을 발휘한다. 그는 과학적 이론의 정교화를 내세우며 프랑크푸르트학파나 실존주의류의 휴머니즘적 서구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와도 대립한다. 이 양대 이데올로기에 모두 영향을 끼친 헤겔의 변증법이 동질적 시간 개념에 근거하는 단일 모순체계로 귀결되는 데에 반해, 그 자신과 맑스의 변증법은 모순의 복수성 내지 현실의 복잡성을 존중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종적으로 경제적 모순이 지배적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순간은 오지 않으며,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과학적 심급에서의 모순들이 주요모순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주요모순과 부차모순들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구조를 부각시킨다. 


이런 취지로 그는 과잉결정 개념을 이렇게 규정한다. “모순의 존재 조건들이 모순 자체의 내부에 반영된다는 것, 복잡한 전체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지배관계를 갖도록 절합된 구조가 각 모순의 내부에 반영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맑스주의 변증법의 가장 심오한 특징이며, 내가 최근에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한 것이었다.”(위하여357) 이 과잉결정 개념의 실천적 의미를 그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지배관계를 갖는 구조는 불변하지만 그 속에서 역할들의 배역은 변화한다는 것이 실로 실천의 커다란 교훈이다. 즉, 주요모순이 부차모순으로 되고 부차모순이 주요모순의 자리를 취하며, 주요 측면이 부차 측면으로 되고 부차 측면이 주요 측면으로 되는 것이다. 항상 주요모순과 부차모순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지배관계를 갖도록 절합된 구조 속에서 역할을 교환하며, 반면 이 구조는 불변한다.”(위하여365) 


경제라는 최종심급을 인정하고,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의 구분을 통해 전략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점에서 알튀세르는 현실사회주의체제가 흔들리던 시기에 맑스주의의 간판을 지켜낸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물론 과잉결정 개념의 도움 없이도 마오의 간명한 책자를 통해 이미 우리는 주요모순 식별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주21. 알튀세르는 마오가 경험적으로 확인한 사실을 원리적 차원에서 설명하겠다고 자처한다. 그러나 그 원리라는 것의 이론적 지위 내지 출생지는 불명확하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어조에 비춰보면 단순한 작업가설일 수 없고, 유물론자임을 자인하는 그가 어떤 선험적 원리를 내세운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경험주의에 대한 그의 혐오를 감안하면 경험적 사실들로부터 추상해낸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경제가 결정적 의미를 지닌다거나 모순들이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은 원론 차원에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매 국면에서 주요모순이 무엇인지, 주요모순과 부차모순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변혁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모아낼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경제를 최종심급의 영역에 모셔놓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심급들과 분야들에서 경제가 작동하는 구체적 인식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심급들과 분야들의 상대적 자율성은 절대적 자율성으로 고착되어갈 것이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인식론은 이러한 현실적 인식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적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경험주의’라는 명칭 아래 비과학적 이데올로기로 폄하하고, 이론적 실천은 ‘그 자체가 기준’이라고 봄으로써 관념론으로 퇴행한다.(주22. 이로 인해 그가 자랑하는 ‘징후독해’ 역시 대상에 대한 본질적 인식이 아니라 체계망상 따위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는 알튀세르의 과학주의와 갈라서면서 감성의 중요성을 앞세우는 그의 제자 랑시에르에게도 해당된다.) 


그렇다면 알튀세르에게서 무엇을 받아들이면 좋은가? 이와 비슷하게 그는 헤겔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폐기’, ‘포기’, ‘제거’, ‘절단’ 등의 언사를 통해 헤겔 지우기로 일관한다. 그러나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인 변증법적 사고를 통해 그의 이론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그에게서 단순한 수사법적 현란함 이상의 교훈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교훈은 그의 헤겔주의 비판과 무관하게 환원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갖되, 주요모순이 가변적이라는 원론에 빠져 자본독재 극복과정에서 노동자정치운동이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의 지속성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 맑스를 위한다는 멋진 구호가 실질적으로는 맑스를 그다지 위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맑스주의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제거하려고 할 때 이론이 얼마나 옹색해지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2. 최종심급에서의 경제 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마지막 유보조항까지 환원론의 잔재로 청산해 버리고, 경제 역시 사회 전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적대의 하나로 설정하는 다원론적 이론가들, 예컨대 라클라우 등이 암암리에 근거로 전제하는 바는 자본의 끈질긴 적응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 형태의 다변화, 예컨대 정동 노동⋅인지 노동⋅비물질 노동 등의 세례명을 얻은 새로운 노동 형태들의 비중 증대, 노동생산성과 불가분한 함수관계에 있는 산업예비군의 증가 등을 근거로, 노동자계급의 실체와 아울러 계급론 자체를 무효화하고 맑스주의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려는 이데올로기들이 한동안 성황을 누려왔다. 


이때 자본의 적응력이라는 것이 실은 위기에 따른 고통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는 야만적 폭력일 뿐이라는 점, 노동 형태의 다변화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따른 착취관계나 전지구적 양극화에 변화를 가져온 바 없다는 점, 다양한 탈-맑스주의 이데올로기들이 번성할 수 있는 자양분으로서 제국주의적 초과이윤으로 이데올로그들을 매수할 수 있었던 경제력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 또한 노동자계급의 분화에 대한 인식에 머물지 말고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라는 객관적으로 결정적인 조건에 근거해 노동자계급을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자본가계급과의 적대적 모순을 그 궁극적 극복을 위해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점도 명확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반-환원론적 관점에서 무페는 헤게모니와 이행전략을 결합한다. 그에 따르면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모든 반자본주의적 부문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적, 도덕적 지도로서, 즉 헤게모니 체계 속에서 진정으로 민주적인 관계를 요구함으로써 헤게모니가 행사되는 제도들의 민주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이행을 위한 전략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위험을 동시에 피할 수 있는 ‘가능한’ 유로코뮤니즘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주23. Ch. 무페: 「오늘날의 그람시」, Ch. 무페(편): <<그람시와 맑스주의 이론>>, 장상철/이기웅 역, 녹두 1992, 29쪽.)


여기서 당연시되는 스탈린주의의 악마화 문제와 별도로, ‘제도들의 민주화’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이행’이라는 전략이 현실성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본독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와 노동자민중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분하지 않으려 드는 반-환원론으로는, 민주주의를 끝없는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는 ‘텅 빈 자리’나 ‘텅 빈 기표’로 보는 ‘형식적 급진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레닌이 강조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부터 노동자 민주주의로의 변증법적 전환 논리에서 ‘구체적 급진성’을 찾기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모든 반자본주의 부문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적 도덕적 지도’와‘진정으로 민주적인 관계’를 어떻게 동시에 성립시킬 수 있을 것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도와 민주의 결합은 각 부문운동들의 요구를 구현하는 데에 노동자정치운동과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자본독재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널리 공유할 때, 이로써 부문운동들이 노동자정치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반자본주의운동에 적극 동참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노동자정치운동은 부문운동들을 위해 이 동참의 구체적 경로와 그 유효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의무를 지닌다. 이 의무의 실현은 ‘제도의 민주화’를 넘어서 노동자정치운동과 부문운동들의 유기적 상호관계가 자발성의 차원에까지 활성화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 상호관계는 활성화될수록, 아직 의식적으로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취하지 않고 있는 부문운동들에까지 확장될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3. 반-환원주의 이데올로그들은 국가를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로 보는 맑스주의 국가론 역시 환원론이라고 거부하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하거나 지배관계 속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결정적 의미를 희석시킨다. 예컨대 국가를 “사회적 생산관계가 재생산될 수 있도록 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다양한 활동”(주24. A. S. 사순: 「헤게모니, 진지전 및 정치적 개입」, A. S. 사순(편): <<그람시와 혁명전략>>, 최우길 역, 녹두 1984, 145쪽 참조.)이라는 주장에서 그런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생산관계 내지 지배관계가 재생산되는 메커니즘 혹은 적대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필요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자본독재권력은 그 ‘다양한 활동’에서 자본독재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자정치운동만은 결사적으로 빼버리거나 억압하려 들 것이다. 이 본질적인 문제에 비춰볼 때 반-환원주의적 국가론은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을 다양한 사회적 적대 속에 파묻음으로써 국가권력의 계급적 본질을 흐리고 자본독재의 유지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반-환원론자 글룩스만은 헤게모니 개념을 반국가주의의 원리로 끌어올려 놓는다. 그에 따르면 “아래로부터 위로의 민주주의 형태의 지표를 제공하는 헤게모니는, 공장평의회에서 발견되는 ‘생산자 민주주의’ 개념에 근거하는 비판적인 반국가주의 원리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한다.”(주25. Ch. B. 글룩스만: 「헤게모니와 동의: 정치전략」, A. S. 사쑨(편): <<그람시와 혁명전략>>, 최우길 역, 녹두 1984, 164쪽.) 하지만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전쟁에서 국가권력을 포기하는 것은 노동자정치운동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래로부터 위로의 민주주의’는 대중적 호소력이 있는 구호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위와 당의 역할에 대한 불신의 산물이자 불신의 밑거름이기도 하다. 


운동 내부의 민주주의를 중요시하더라도 이와 관련한 레닌의 비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배출된 변절적 지도자와 기회주의 정당들이 노동귀족층의 이해관계를 옹호함으로써 노동자민중과 분리되는 현상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배신적 지도자들을 폭로하고 몰아내는 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해서 당 원칙과 규율을 거부하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키는 것”과 같으며, “자본주의 붕괴의 전야로부터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나 중간단계가 아니라 가장 높은 단계로 건너뛰는 것”을 뜻한다고 지적한다.(주26. 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게 1995, 41-42쪽 참조. 이하 ‘소아병’으로 약칭) 이러한 비판과 함께 “당이 매일매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주27. J. 스탈린: <<레닌주의의 제문제에 관하여>>, 윤시인 역, 두레 1990, 198쪽 참조.)는 스탈린의 처방도 당과 전위 중심의 운동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존중할 만하다. 



5. 탈-위계주의


1. 당 중심 운동에 대한 불신을 원리화하는 탈-중심주의 내지 탈-위계주의는 데리다의 해체론과 들뢰즈의 차이형이상학을 통해 철학적 권위를 갖춘다. 문자에 대한 음성의 우선성이라는 통념을 뒤집으며 시작되는 데리다의 이론은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중심과 주변 등의 이분법에 따른 위계구조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문다.(주28. J.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역, 민음사 1996, 41쪽 등 참조.) 해체론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예컨대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테제에 대한 엥겔스의 혁명적 해석, 즉 이성적이지 못한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며 따라서 허상인지라 곧 무너지리라는 해석(주29. F. 엥겔스: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양재혁 역, 돌베게 2015, 34쪽 참조.)에 감명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이성이 누구의 이성이냐, 혹시 서구 백인 남성 부르주아의 이성 아니냐 하는 의심이 혁명의 절박성을 앞지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은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의 피를 뜨겁게 달궈 주었다. 해체론의 자력장 안에 노동‘중심’이라는 ‘특권’이 들어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차이를 궁극의 제일원리로 옹립하는 형이상학을 통해 그는 모순의 지위를 차이보다 ‘깊이가 얕은 것’, 차이의 ‘광학효과’ 따위로 끌어내린다. 그는 모순을 현실적 변화발전의 동력으로서만 아니라 인식의 기관으로 삼는 헤겔 변증법을 변증법의 타락한 형태라고 단죄한다. 그 심오한 근거로 그는 헤겔(맑스, 엥겔스, 레닌, 아도르노만 아니라 어떤 이성이든 이성을 가진 사람 대부분)의 생각과 달리 개념을 통한 재현적 사유는 생산성이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그 역시 알튀세르처럼 맑스에게서 헤겔을 떼어내는 데에 열성이다. 그에 따르면 부정의 부정이 아니라 차이의 긍정이 역사발전의 동력이며, “모순은 프롤레타리아의 무기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르주아가 자신을 방어하고 보존하는 방식”(주30.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564쪽. 이하 ‘차이’로 약칭.)이다. 차이가 대립에 비해 일차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자본론>> 안에서 사회적 다양체의 중심부에 있는 분화의 범주(노동 분업)는 대립, 모순, 소외 등과 같은 헤겔의 개념들을 대체하고 있다”(차이447)고 왜곡하기까지 한다. 


2. 라이언은 해체론을 탈-레닌주의적 맑스주의의 무기로 삼고자 한다. 그는 파리코뮌을 ‘원시적인 해체론적 조직형태’라고 해석하며, 사회주의화는 ‘반차이적 위계질서의 해소’라고 규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레닌의 중앙집권주의를 반맑스주의적인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에 따르면 레닌의 경우 “무엇이 분쇄된 국가기구를 대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백하다. 그것은 여전히 국가이다. 그는 국가의 궁극적 ‘사멸’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지적과 함께 중앙집권주의, 규칙, 그리고 행정 권력에 대해 집요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 없는 사회에 대한 레닌의 생각이 맑스의 그것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주31. M. 라이언: <<해체론과 변증법>>, 나병철/이경훈 역, 평민사 1994, 325쪽. 이하 ‘해체’로 약칭.)


중앙집권주의에 맞서 라이언은 ‘교환관계를 넘어서는 차이적 계획화’를 추구한다. ‘차이적 계획화’란 “필요에 기반한 복수 투자, 발의권의 다양화, 상황에 따르는 적응(사회적, 자연적 환경과 계획의 상호 작용을 조정하는 메카니즘), 거시구조적인 단일한 전체적 계획화의 이론적 경향에 대항하는 다양한 미시구조적 ‘기본수준’, 계획의 강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심’을 통한 매개적 중계가 아니라, 부분들 간의 직접적 상호 접촉 등이다. 그러한 미시적 계획화는 분명히 가치의 법칙을 폐지하는 것으로서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해체365) 


제국주의국가들에 포위된 채 내전을 겪으며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던 레닌 시대 소련이 국가사멸의 길로 즉각 들어가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왜 호전적 제국주의국가들 앞에서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라이언에게는 엥겔스가 반권위주의자들, 즉 무정부주의자들을 향해 제기한 비판을 그대로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권위적인 정치적 국가가 생겨나게 되는 사회적 조건을 일소하기도 전에 그것을 일소하기 위한 국가부터 폐지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파리코뮌에서 구현된 근본 민주주의, 즉 ‘국가와 국가 기관들이 사회의 종복으로부터 사회의 주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막을 ‘절대 확실한 방책’을 강구한 것을 ‘원시적인 해체론적 조직형태’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엥겔스가 파리코뮌을 프롤레타리아독재라고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맑스도 파리은행을 몰수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티에르가 비스마르크를 끌어들이기 전에 티에르 일당을 군사적으로 제압하지 못한 것을 파리코뮌의 결정적인 오류라고 아쉬워했다. 즉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맑스에게도 혁명은 ‘존재하는 가장 권위적인 것’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라이언이 제안하는 ‘차이적 계획화’에는 부분적으로 고려할 만한 항목도 있다. ‘발의권의 다양화’, ‘상황에 따르는 적응(사회적, 자연적 환경과 계획의 상호 작용을 조정하는 메카니즘)’ ‘계획의 강조’ 등은 노동자국가 건설과정에서 활용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교환관계와 가치법칙을 넘어서고 폐지하는 일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곧 노동자국가에서는 현실적이지 않다. ‘거시구조적인 단일한 전체적 계획화의 이론적 경향’ 또한 ‘다양한 미시구조적 기본수준’으로 대체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오히려 양자의 유효적절한 결합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라이언의 조급함을, 이 시대의 생산력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자민주주의를 넘어서 지배관계 및 국가의 사멸로 향하는 ‘절대 확실한 방책’들을 찾아낼 필요성을 환기하는 자극제로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이다. 


3. 당 중심의 운동과 욕구의 모든 위계적 고정화를 거부하는 자율주의 운동의 주요 이론가 네그리 역시 차이 개념을 칭송한다.(주32. M. 비아노: 「서설」, A. 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 윤수종 역, 새길 1994, 47쪽 참조.) 그에 따르면 ‘차이를 최고도로 강조하는 것’이 ‘공산주의론의 가장 고도한 접근법’이다. 노동자계급권력은 “부르주아지의, 자본의 정치적 계급들의 중앙집권화되고 동질적인 권력에 대한 부정이다. 노동자계급권력은 모든 동질성의 해체다. 이러한 방법론적 ‘다원성’, 이러한 다자성이 승리한다.”(주33. A. 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 윤수종 역, 새길 1994, 276쪽. 이하 ‘넘어’로 약칭.) 이때 네그리는 중앙집권화된 동질적 권력에 대한 부정을 미래의 공산사회를 위해 미뤄두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정치와 직접 맞세우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단계가 필수적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한 단계(stage) 혹은 통로(passage)가 아니며 어떤 경우에도 그것일 수 없다. 사회주의는 자본의 경제적 합리성, 이윤의 합리성의 최고의 형태, 우월한 형태다.”(넘어300) “사회주의에는 오직 성숙한 자본주의의 발전이 있을 뿐이다.”(넘어320)


이런 관점에서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이었더라도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였을 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규정은 클리프의 ‘관료적 국자자본주의론’(주34. T. 클리프: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기원>>, 이수현 역, 책갈피 2010, 59쪽 등 참조.)과 마찬가지로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 의의, 자본주의와의 본질적 차이, 제반 조건으로 인한 한계 등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네그리는 국가 자체의 파괴를 변혁운동의 일차과제로 설정한다. “국가는 자본의 최후의 피신처이고 그리하여 국가의 파괴는 노동자권력의 첫 번째 근거지가 된다.”(넘어340)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 전환을 변혁 전략의 주요 변수로 파악하지 않고자 하는 그에게서는 “자본주의 붕괴의 전야로부터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나 중간단계가 아니라 가장 높은 단계로”(소아병41-42) 건너뛰려는, 혹은 의식의 전환만으로 현실적 장애들을 초월하고 싶어 하는 무한한 자유의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네그리가 사회주의를 건너뛰고 자본주의 속에서 ‘동시(대)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공산주의의 요체는 “가치법칙, 가치 자체, 그것의 자본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변이형태에 대한 동시적 파괴다. 공산주의는 착취의 파괴와 산 노동의 해방이다.”(넘어179) 그리고 가치법칙과 착취의 파괴 혹은 산 노동의 해방에 이르는 길은 한마디로 ‘노동 거부’ 내지 ‘노동의 폐기’다. “공산주의의 내용과 프로그램은 임금노동의 조직화라는 집단적이지만 참혹한 기초 위에 출현한, 그러나 혁명적인 방식으로 노동의 폐기, 노동의 분명한 죽음을 의미하는 보편적 욕구의 발전이다.”(넘어291) 네그리는 ‘노동 거부’를 ‘유토피아에 대한 우둔한 접근이 아니라 주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구체적인 구성적 과정의 척도’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풍부한 욕구를 지닌 ‘공산주의적 주체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넘어300-301) 그는 맑스의 <<요강>>을 끌어들여 공산주의적 주체성을 이렇게 규정한다. “주체성은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재구성하는 마그마이며, 그 마그마가 비옥하게 만든 토지 위에 확산되는 쾌락의 흐름, 제안 및 발명들의 연결망이다. 공산주의 혁명, 모든 권력을 가진 사회적 개인의 출현은 이러한 풍부한 대안들, 제안들, 기능들을 창출한다. 또 자유를 창조한다.”(넘어276)


노동 거부를 결정하는 노동자, ‘모든 권력을 가진 사회적 개인’의 출현을 네그리가 1970년대 이탈리아의 노동자투쟁에서 일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더라도, 오늘날 왜 노동자민중이 그렇게 노동 거부에 돌입하지 않는지, 혹은 못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주체를 이데올로기의 호명 객체로 바꿔놓는 알튀세르의 구상이나 지배당하기를 스스로 원하는 관리되는 존재로 파악하는 아도르노의 비관론과 비교할 때, 네그리의 공산주의적 주체는 주체라는 개념 본연의 의미에 훨씬 더 충실해 보인다. 그러나 현실 속의 주체는 자본독재로 인한 지배관계에 의해 강력히 규정받는 가운데, 이에 저항하여 대안사회를 만들 잠재력도 가진 갈등적이고 다층적인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갈등을 극복하며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지난한 운동과정이야말로 낮은 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실제 양상일 것이다.



6. 나가며: 문제는 전략이다


1. 이 지난한 과정에서 자본의 탄생부터 종말까지 적대관계에 놓이는 노동자민중이야말로 자본독재에 맞선 투쟁의 중심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좌파이론들에서 흔히 전제되는 반-노동자중심주의를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독재의 분열책과 매수, 서열화와 이데올로기 공세 등으로 계급적 단결에서 멀어져 각자도생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재의 다수 노동자민중이 자생적으로 대안사회 건설에 적극 나서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점에서 자본독재를 상대로 한 해방전쟁의 선발대 혹은 길잡이로서 전위 조직 혹은 당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당 중심의 변혁운동을 거부하는 신좌파적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 전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본독재로 인한 파국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현실적 구체적 대안을 생산하고 이를 노동자민중과 공유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이 대안사회 건설에 적극 동참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변혁운동의 적극적 주체들은 ‘공산주의를 강의하는’ ‘작은 종파’에 머물 수 없고, ‘행동하는 거대한 당’(주35. F. 엥겔스: 「맑스와 <<신 라인 신문>> 1848~49」,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 6권,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2006, 4쪽 참조.)으로, 현실적인 대안세력으로 성장해가야 할 것이다.


2. 자본주의 국가는 본질적으로 노동자민중을 억압하는 자본독재의 주요 무기다. 반면에 노동자국가는 제국주의적 자본권력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한 무기다.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 즉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자본독재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더라도 자본권력은 간단히 사라지지 않고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러한 저항을 제압하지 않으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국가권력을 그 계급적 성격과 무관하게 악마화하는 신좌파 이데올로기들에 동조할 필요 없다. 그러나 노동자국가가 다시 노동자민중에 대한 억압기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절대적으로 확실한 조치들’을 마련하는 것, 궁극적으로 국가사멸과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혹은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역동을 설계함으로써, 노동자국가를 기존의 지배장치들과 차별화하는 것은 이념적 지표의 차원에서 대안 생산 과정에서부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 대안 생산 과정에서 기존의 어떤 단일 모델이나 이론도 절대선 혹은 최종판이 될 수 없다. 또 신좌파 이론들을 포함해 어떤 유산이든 미리부터 배제할 이유도 없다. 적으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 노동자중심성, 전위의 중요성, 노동자국가의 전략적 의의 등을 인정하는 전제하에, 다양한 입장 차이를 넘어 풍부한 대안 생산의 공동작업을 조직적⋅체계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실천적 요구와 조건에 근거해 현실성 있고 효율적인 대안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무제한의 지적 노동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천재적 개인이나 소집단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벗어난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논쟁과 검증을 거치며 운동 통일의 범위와 힘을 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들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조직적 헌신의 성과와 이를 바탕으로 자본독재를 극복하는 장구한 투쟁 과정을 통해서만, 신좌파가 빠져든, 혹은 신좌파 이데올로기들이 파놓은 함정들을 실질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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