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혁명가 열전] 류샤오치(劉少奇) - 마오쩌둥의 후계자에서 인민의 적으로 전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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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의
류샤오치(1898-1969) 후난성 닝샹현(寧鄕縣) 출생. 위대한 맑스주의자이자 무산계급 혁명가, 정치가, 이론가이다. 당과 국가의 주요 지도자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원로로 마오쩌둥을 핵심으로 한 당의 1대 영도 집단의 주요 성원이었다. 류샤오치 동지는 중국 혁명과 건설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경제, 정치, 군사, 문화, 교육, 외교 및 당의 건설 등에서 탁월한 공훈을 세웠다. 그는 전당과 전군, 전국 인민들의 충심어린 사랑을 받았다. (중국포털 바이두 전재)
지도자라고 하지만 이보다 더한 찬사를 받기 어려울 정도이다.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의 후계자였다. 국가주석에 올랐으며 군사위원회 주석 및 공산당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 운동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등 신중국 건설을 위해 매진하다가 마오쩌둥에 의해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주자파로 지목되어 타도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실각한 그는 주자파의 우두머리, 반혁명 분자의 누명을 쓴 채 문화대혁명에서 잔혹한 박해를 받고 사망하였다. 그의 아내 왕광메이(王光美)도 1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아들과 딸이 차례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그의 부친 또한 소련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가두 비판을 당하는 등 박해를 받고 자살하였다. 류샤오치는 1980년 덩사오핑이 당의 지도자가 된 후 복권되었으며, 그의 일족 또한 기나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류사오치는 1919년 중학교(현재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20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21년에는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동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같은 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니까 공산당 창립 원년의 멤버가 된 것이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후 중국 노동조합 서기부에서 활동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에도 초기 멤버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현재까지 활동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류샤오치도 처음부터 중심적 인물이 된 것이다. 장시성 안위안(安源) 탄광 파업은 중국의 노동운동사에서 유명한 투쟁이다. 그는 리리싼 등과 함께 파업을 지도했으며, 안위안 탄광 노동자클럽의 주임으로 활동했다. 1925년에는 전국 노동조합 총공회(총연맹)의 부위원장에 당선되었으며 상하이, 광저우, 우한 등 노동운동이 활발한 지역에서 활동했다. 이 무렵 류샤오치는 홍콩·광저우 총파업, 5.4 운동에서 노동자 대오를 이끌었다.
1927년 중공 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되었으며 장제스의 상하이 정변후 허베이, 상하이와 동북에서 비밀공작을 벌였다. 1930년 여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로핀테른 대회에 참가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31년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피선되었다. 소련에서 귀국한 그는 중공 직공부장(노동부장) 및 총공회 당서기를 맡았다. 그는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장기간 은신하며 군중공작을 벌였으며, 당시 당에 횡행하던 모험주의와 폐쇄주의에 맞서 당내 투쟁을 벌였다. 초기 노동운동을 주도하던 리리싼이 모험주의로 주도권을 잃었고, 덩중샤는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된 반면 류샤오치, 천윈 등은 당의 중심에서 노동부문을 이끌게 된다.
1932년 류샤오치는 장시성 남부와 푸젠성 서부의 중공 혁명근거지에서 노동운동을 지도했으며 푸젠성 당서기를 겸했다. 중공이 장정을 떠난 후 구이저우성 쭌이에서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소련 유학파와 논쟁할 때 류샤오치는 마오를 견결히 지지했다. 이때 마오쩌둥의 상당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판단된다. 항일전쟁에서 그는 중원국 서기로 유격 전쟁의 정치적 중심에 있었다. 1941년 환남사변 후 신사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자 그는 신사군 정치위원 및 화중국 서기를 맡아 천이와 함께 지역 당과 군대를 함께 재건하였다. 그는 “공산당원의 수양을 논한다.”는 저작 및 강연을 통해 당 이론에도 정통했음을 증명했다. 류샤오치는 1945년 7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개괄 및 정립하여 보고하는 등 더욱 마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 마오쩌둥이 적지인 충칭으로 가서 장제스와 담판할 때 그는 옌안에서 중공 주석대리를 맡아 유고 시 후계 지위에 있음을 증명하였다.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류샤오치는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을 주도하는 등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되자, 그는 중앙 인민정부 부주석에 선출되었으며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외교 등 여러 방면에 두루 관여하였다. 1954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보고했으며 전인대 상무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56년 중공 중앙 부주석에 당선된 그는 1959년 9월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공 국방위원회 주석도 겸임하여 정치와 군사를 아우르는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그가 왜 마오쩌둥과 멀어지게 되고 마침내 밀려나 반혁명의 누명까지 쓰게 되었던가? 그것은 대약진 운동이 실패한 후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방향 및 사상의 차이에서 비롯하였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최소 2천만에서 최대 4천만의 인민이 아사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임하였다. 그후 류샤오치, 덩샤오핑, 천윈 등이 주도하는 경제 조정정책이 추진되었다. 집단농업을 추구하던 인민공사는 후퇴하고 3자 1포 정책이 추진되었다. 3자 1포란 자경농지, 자유시장, 개인기업 등을 허용하고 생산량이 증대하면 인센티브를 허용하는 등 생산력 확대를 위해 채용한 신경제 정책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거기에 스탈린 사후 벌어진 중소분쟁 이후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등은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움직임을 자본주의의 부활로 인식하였고 반격을 모색하였다.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로 대표되는 두 진영은 경제, 외교, 교육 등 모든 면에서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마오쩌둥이 마침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당의 실권파를 타도하기에 이르렀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류샤오치는 “주자파의 우두머리” “반혁명 분자”로 공격받았으며 1966년에는 당 부주석에서, 1968년에는 국가주석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에서 제명되었고 베이징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되었다. 홍위병들은 공공연하게 그를 습격하였고 그해 여름 그는 집에서 두 시간 동안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그후 류샤오치는 허난성 카이펑으로 옮겨졌으나 지병인 당뇨병, 폐렴이 악화되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집에서 신음하던 그는 그해 겨울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 후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일족은 장기간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하였다. 1980년 4인방이 축출된 후 그는 복권되었으며, 덩사오핑이 국가 지도자가 되어 중국은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류샤오치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대약진운동 실패 후 덩이 류샤오치와 함께 추진하던 신경제 정책이 좌절되지 않았으면 중국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모습과 매우 달랐으리라 생각한다. 역사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모델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원로 혁명세대 중 가장 젊었던 덩샤오핑은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등 자신과 함께 하던 이들이 사라진 뒤 마오쩌둥 노선의 반대방향으로 나아갔다. 현대 중국은 마오쩌둥 노선의 반작용으로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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