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 인물열전] 허룽(賀龍), 식칼 두자루로 무장투쟁을 시작하다


본문
이철의 (國共內戰 저자)
허룽은 중국 십대 원수 중 가장 흥미있는 인물이다. 그는 온 집안이 비밀결사 조직 가로회의 구성원이었으며 허룽 또한 조직의 말단 간부였다. 허룽은 어릴 때부터 반청, 반체제의 기운 속에서 성장하였다. 흉년일 때 부자들의 창고 털기, 부잣집이나 권세가의 도련님들 혼내주기 등 반항에서 그는 차츰 리더로 성장하였다. 결국 그의 집안은 산적으로 변모했는데, 가로회에서의 영향력으로 금방 천명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산적이나 토비는 체제의 수탈에 견디다 못해 저항하는 농민들이었다. 지금 중국에서 농민반란이나 비적들의 봉기는 기의로 표현된다. 원말의 명교반란은 결국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졌으며 청나라 말기에도 가로회, 태평천국, 의화단 등 수많은 봉기와 저항이 잇따랐다.
저우언라이나 덩샤오핑같은 유학파는 말할 것도 없고 쑤위나 류보청, 쉬샹첸 등은 일찍이 공산당에 몸을 담은 정통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더나 허룽같은 인물은 국민당군의 고위 장교에서 혁명에 투신한 인물들이다. 그중 허룽은 산적 출신에서 십대원수로 성장하여 더욱 극적인 인생사를 보여주었다. 중국 공산당사나 바이두 인물사전에서는 그가 후난성에서 반제 반봉건 투쟁을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단지 두 자루의 식칼(중국의 식칼은 작두날만큼 크다)을 들고 투쟁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녹림의 호걸’다운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공식 당사로 돌아가 보자. 허룽, 1896년 후난성 쌍즈(桑植) 출생. 위대한 혁명가이자 군사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시자이자 영도자 중 한사람이다. 그는 반세기 동안 혁명투쟁에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 신민주주의 혁명,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55년 공화국 원수 계급을 받았으며 8.1훈장, 일급 독립자유훈장, 일급 해방훈장을 받았다.
△ 왼쪽부터 허룽, 주더, 마오 (1938년 제6기 중앙위에서 대화)
국민당 군단장으로 난창 기의를 지휘하다.
난창기의는 1927년 8월 1일 장시성 난창에서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을 의미한다. 중국은 이날을 기념하여 건군절로 삼고 있다. 공산당 지도부이던 취추바이, 저우언라이, 리리싼, 장궈타오 등이 폭동을 결정했고 주더, 류보청, 덩중샤, 탄핑산이 지도했으며 총지휘 허룽, 전적 총지휘 예팅 등이 직접 지휘를 담당했다. 그러나 폭동은 실패하였고, 봉기군은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징강산의 마오쩌둥 부대와 합류하게 된다.
흥미있는 일은 이때의 허룽이 공산당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허룽은 당시 국민혁명군 20군 군단장이었다. 당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의 난창폭동에 반대했는데 상하이에 있던 장궈타오가 전달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 탄핑산 등 폭동 지도부는 “허룽과 봉기 약속이 되어 있어 안된다. 만약 계획을 포기하면 허룽이 우리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강행을 주장하였다. 이 일로 장궈타오는 “난창기의를 반대했다”는 역사의 모자를 쓰는데 코민테른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폭동이 실패하자 허룽은 상하이로 가서 저우언라이를 만나게 되었다. 기의군 총지휘인데도 그를 잘 몰랐던 저우언라이는 허룽을 소련에 보내어 군사학을 공부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허룽은 "상서(湘西), 운귀(雲貴, 운남과 귀주), 천유(川渝, 사천과 중경)의 지형과 인심은 내가 잘 알고 있다. 특히 상서지구에서 인원을 끌어모으는 것도 문제가 없다. 내가 돌아가서 홍군을 조직하겠다" 고 주장했다고 한다.
가로회 출신인 허룽은 금방 병력을 모았고 나중에 장정의 2방면군으로 발전하였다. 에드가 스노는 ‘중국의 붉은 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홍2방면군은 장정 도중 천명 이상이 설산에서 동사했고, 수천명이 아사했거나 국민당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하지만 하룡의 개인적인 영향력이 아주 컸다. 많은 부하들은 그와 생사를 함께 하고자 했고, 중도에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당시 국민당은 “살주발모조하룡(殺朱拔毛抓賀龍 : 주더를 죽이고, 마오쩌둥의 털을 뽑으며 허룽을 사로잡자)”는 표어로 적개심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허룽 집안의 희생과 최후
항일전쟁 시기 허룽은 사단장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당시 팔로군이 3개의 사단을 가지고 있었고 린비아오, 류보청, 허룽 등이 핵심 지휘관이었다. 국공내전에서 그는 18군단장으로 쓰촨성을 해방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쑨원의 국민 혁명군부터 군대에 몸을 담은 허룽은 마침내 십대 원수에 올라 인생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국민당군의 칼에 난자당했고, 막내동생은 15세에 팽형을 당했다. 누나 둘도 희생되었고 여동생은 능지처참을 당한 후 성문에 효수되었다. 가로회와 산적, 그리고 국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투쟁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이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허룽은 반당분자로 낙인이 찍혀 가정이 파탄났다. 딸은 “허룽이 원숭이와 개에게 고기를 먹이는 등 반혁명을 했다”고 고발했다. 투옥된 그는 1969년 한을 품고 사망했다. 죽을 때 그는 “마오 주석이 허룽은 나의 동지였다. 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는 말을 남겼다 한다. 펑더화이도 연금 상태에서 죽을 때 “나는 주석에게 따질 말이 있다”고 했다는데 그처럼 문화대혁명은 수많은 혁명 원로들에게 비참한 말년을 선사하였다. 장자제(张家界:유명한 관광지)시의 허룽 출생지 생가는 기념물이 되었고 주변에 ‘허룽 공원’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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