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인물 열전] 공산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으로 넘어간 장궈타오(張國濤) —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혁명과 자신을 망치다. >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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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인물 열전] 공산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으로 넘어간 장궈타오(張國濤) —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혁명과 자신을 망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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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신문
2025-09-01 14:43 18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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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의 (國共內戰 저자)


궈타오는 중국 공산당 창당멤버이다. 1921년 공산당이 창립되었을 때 그는 베이징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3명의 창당 멤버 가운데에서 그는 베이징 대학 출신의 인텔리였다. 그는 베이징 대학에서 리다자오 교수의 제자로 있었다. 때문에 그는 마오쩌둥을 청강생이라고 부르며 무시했다고 한다. 훗날 장궈타오는 공산당에서 집중적인 비판을 받고 탈당하여 국민당에 귀순했다. 국민당에서도 푸대접을 하자 홍콩으로 망명했으며 나중에는 캐나다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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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궈타오는 1887년 장시성 핑샹현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 베이징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했는데 여기서 리다자오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19년 5.4 운동이 발발하자 베이징 대학 학생연합회 강연부장으로 적극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공산당 창립을 위해 대학내에서 조직활동을 벌이고, 1921년 류런징(劉仁靜)과 함께 베이징 대표로 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1922년 중공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어 활약했으며 공농부 주임 등 요직에서 복무했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 정변을 일으키자, 공산당은 장시성 난창에서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이때 코민테른은 난창폭동에 부정적이었는데 장궈타오는 난창에 가서 폭동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준비가 완료되어 거사를 되돌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리리싼, 저우언라이가 기의 결행을 극력 주장하고 대다수 성원들이 동의하자 장궈타오는 부득이 다수에 복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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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옌안에서 정치국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 중 일부가 단체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장웬티엔, 강성, 저우언라이, 카이펑, 왕밍, 마오쩌둥, 런비시, 장궈타오 (중국 공산당 뉴스 네트워크)


1928년 장궈타오는 소련으로 가 코민테른의 중공대표로 활동했다. 1931년 귀국한 그는 악예환(후베이, 허난, 장시성 포괄) 소비에트 중공 분국 서기 및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소련에서 귀국한 28인의 볼세비키가 당의 주도권을 잡자, 장궈타오도 그들에게 적극 호응했다. 왕밍(王明)의 모험주의에 동조한 그는 근거지 내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하여 많은 당원과 홍군 전사들을 죽이거나 당적을 박탈했다. 이때 죽은 홍군 지휘관이나 전사들이 전체 성원 중 사분의 일에 이르렀다고 한다. 심문방법도 가혹하여 묶어놓고 때리거나 고춧가루 물을 코에 들이붓기, 손톱에 대나무 침을 박는 등 혹형을 가하였다.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국민당의 대대적인 토벌이 진행되자, 그는 근거지를 쓰촨성 북부로 이전하였다. 장시성의 중앙근거지에 4차 포위토벌이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쓰촨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다시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으나 국민당의 압박이 계속되었다. 장시성의 중앙근거지가 장정을 떠나 쓰촨으로 향하자, 장궈타오가 지휘하는 홍군도 4방면군이 되어 마오쩌둥의 1방면군과 합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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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장궈타오의 반혁명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두 부대가 성공적으로 회합하여 세를 모았으나, 진행 방향을 두고 이견이 발생한 것이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앙 지도부와 1방면군은 항일북상을 주장하였다. 즉 산시성과 간쑤성 등 북쪽으로 가서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궈타오는 쓰촨과 칭하이성 경계에 근거지를 만들자고 하여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때 홍 1방면군은 1만명의 병력이었고 4방면군은 8만명에 달해 장궈타오쪽이 압도하고 있었다. 병력의 우세에 자신감을 얻은 장궈타오는 전체회의에서 항일북상이 결정되었는데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장궈타오가 딴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한 마오쩌둥과 1방면군 지휘부는 독자 북상하기로 하고 몰래 길을 떠났다. 장궈타오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이 혁명을 배신했다.”고 비난하고 1방면군 공격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군사책임자인 쉬샹첸이 “홍군이 홍군을 공격할 수 없다.”고 반발하자 이를 취소하고 대신 독자적으로 당중앙을 선포하였다. 


1방면군이 장정을 완수하고 옌안에 안착했으나 4방면군의 운명은 그렇지 못했다. 쓰촨에서 국민당군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8만의 병력이 2만명으로 줄어드는 대실패를 겪은 것이다. 칭하성과 쓰촨성을 오가며 패전을 거듭한 4방면군은 결국 섬북으로 방향을 틀어 북상을 시작했다. 장궈타오도 당중앙을 취소하고 마오쩌둥과 지도부의 방침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옌안을 코앞에 두었을 때 그의 부대는 회족의 국민당 군벌 마부팡 부대의 습격을 받아 병력 대부분을 잃었다. 1936년 10월 수백명으로 줄어든 병력을 이끌고 장궈타오가 옌안에 도달하였다. 마오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그를 부주석으로 인정하는 등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6년 공산당 안에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일어났다. 정풍운동은 왕밍을 중심으로 하는 소련 유학파, 장궈타오 등 다른 지역에서 성장한 지도 인사들의 영향력을 박탈하고 당을 마오쩌둥 중심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코민테른 등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중국 공산당의 독자노선을 확립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장궈타오는 “분열주의와 군벌주의”로 비판을 받았고 그의 휘하 지휘관들도 함께 비판을 당했다. 당에서 영향력이 사라진 장궈타오는 섬서성 주석을 맡았으나 그는 좌불안석의 처지가 되었다. 1938년 장궈타오는 섬서성 성도 시안으로 가서 국민당에 귀순했다. 국민당은 마오쩌둥의 라이벌이라 여기던 장궈타오의 귀순을 크게 환영하고 팔로군의 선무공작 등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때 마오쩌둥은 그의 처자를 시안에 보내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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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국민당 특무조직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서 ‘특종정치문제 연구실과 특종정치공작 훈련반을 맡아 반공활동을 벌였다. 국민당에서 참정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항일전쟁이 끝나자 장시성에서 빈민구제원 등 한직을 맡았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배가 확연해진 1948년 11월, 장궈타오는 타이완으로 피신했다. 국민당의 패배가 확정된 그해 겨울 그는 처자식을 데리고 홍콩으로 망명했으며 1968년 다시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가난에 시달리던 그는 1979년 겨울, 양로원에서 동사했다.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침대에서 떨어진 이불을 끌어올리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그를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했지만 지금은 명예가 회복되었다. 장시성 핑샹(萍薌)현에 있는 그의 생가는 기념관이 되었고 장정 100주년 기념관에 그의 흉상도 세웠다. 역사의 배신자마저 포용할 만한 자신감이 생긴 것일까? 항일에 적극적이었던 국민당 인사들을 역사적으로 재평가하는 흐름과 궤를 같이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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