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인물] 국민당 치하에서 암약한 첩보원들 (3) - 전 3걸의 남은 이야기
본문
이철의 (國共內戰 저자)
1. 당의 지도부를 구한 치엔좡페이
한 시절을 풍미했던 공산당 첩보원 전 3걸의 훗날은 어찌 되었을까?
1931년 4월 24일, 구순장은 국민당 당국에 체포된 후 난징으로 호송되었다. 그는 심문을 받으며 상하이의 중공 중앙기관의 위치 및 당의 비밀, 요인들의 정황을 모두 불었다. 구순장은 국민당이 빨리 움직이면 중공 중앙의 요인들을 사흘 내에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면서 심문자들에게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쉬언징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밀이 새면 모두 헛공사가 될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심문했던 이들은 즉시 전보를 작성하여 난징의 쉬언징에게 보고했다. 전문은 모두 5통에 이르렀다. 이때는 토요일 저녁시간이 되어 쉬언징은 이미 상하이로 가고 없었다. 그는 상하이의 환락가에서 접대를 받으며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 이 틈이 공산당 지도부를 살렸다. 전문을 해독한 치엔좡페이는 당 중앙에 급보를 알렸다. 그는 자신의 사위에게 밤차로, 즉시 상하이로 가서 당에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토요일 아침, 리커농은 소식을 들은 뒤 천겅에게 보고했고 천겅은 저우언라이에게 알렸다.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상하이의 중앙 및 산하 각급 기관에 즉각 이전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치엔좡페이는 공산당 중앙기관과 관련자들의 목숨을 극적으로 구했던 것이다. 국민당 정보당국이 움직이기 전에 피신한 사람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월요일 새벽, 치엔좡페이는 출근하여 여섯 통의 전보를 작성하여 쉬언징에게 남겼다. 그리고 즉시 자리를 이탈하여 난징에서 상하이로 가는 차에 올랐다. 그는 딸 두 명을 난징에 남겨 두었다. 작은 딸이 아직 어려 데리고 가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신 그는 쉬언징의 책상에 편지를 한 장 놓아두었다. “우리는 정견이 서로 다릅니다. 저는 떠나지만, 자식들을 연루시키지 마십시오. 자식들에게 화가 미친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당신이 특무활동비를 사적으로 유용하거나 횡령한 증거를 모두 폭로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과 부하들의 사생활을 까발릴 것이니 유념하기 바랍니다.”
쉬언징은 기가 막혔지만, 사실을 덮어버리기로 하였다. 자신이 공산당원을 비서로 채용한 사실이 알려지면, 본인은 물론 추천한 천리푸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었다. 쉬언징의 이런 태도는 그 후 국민당에 두고두고 화가 되었다. 공산당 지도부와 홍군이 장정을 떠난 뒤 한차례도 매복에 걸린 일이 없었다. 쉬언징이 비밀 정보국 무선전신의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작전 지시를 모두 간파하여 진로를 정할 수 있었으니, 한 사람의 유능한 간첩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간첩의 중요함을 설파했던 손자가 보더라도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 후 치엔좡페이의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쉬언징은 일단 간첩의 사위와 딸, 그리고 작은 딸을 잡아 오게 하였다. 하지만 계륵과 같은 존재들이어서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고민 끝에 쉬언징은 그들을 모두 석방하고 말았다. 자신의 운명과 그들의 목숨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신분이 폭로된 치엔좡페이는 조직의 명령을 받아 장시성의 중앙 소비에트로 갔다. 거기서 그는 홍 1방면군 보위국장 겸 중앙 혁명군사위원회 총참모부 제2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중앙 소비에트는 장정을 떠났고 1935년 쭌이회의가 열린 뒤, 그는 홍군 총정치부 부비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구이저우에서 우강(烏江) ―항우가 최후를 맞이하였던 그 오강이다―에서 단신으로 정찰하다가 실종되었다. 공산당은 돌아오지 않는 그를 전사한 것으로 결정했다. 그는 혁명열사로 추증되었으며, “신중국 성립에 중대한 공헌을 한 10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묘지는 구이저우성에 있으며, 주변에 국가안전 교육기지와 구이저우성 애국주의 교육기지를 설치하였다.

2. 동지의 손에 살해된 후디
전 3걸 중 영화배우였던 후디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디는 치엔좡페이, 리커농과 함께 비밀 정보조로 편성되어 활동했다. 후디는 국민당 무선통신사인 창장통신사에서 편집을 맡았다. 얼마 후 그는 텐진으로 가서 일본조계에 국민당 정보조직인 장성통신사를 설립했다. 텐진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취급하게 된 것이다. 1930년 후디는 장쉐량의 동북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그는 국민당 정보국의 자금으로 동북과 화북에 공산당 중앙특과의 비밀조직을 설치했다. 후디는 특히 장제스가 지시한 국민당의 중앙소비에트 포위토벌 작전계획에 관한 기밀을 입수하여 당에 보고하였다. 루이진의 마오쩌둥을 비롯한 홍군이 국민당의 토벌에 효과적으로 응전할 수 있었으니, 이들 첩보원의 공적이 적다고 할 수 없다.
1931년 4월 구순장이 배신한 뒤, 리커농은 후디에게 네 글자로 된 전문을 보냈다. “극조병독(克潮病篤)” 이미 약속되었던 암호문이었다. 극은 리커농(李克农)을 의미하며 조는 치엔좡페이, 병독은 사태가 엄중하다는 뜻이었다. 후디는 전보를 받고 즉시 기선에 올라 텐진을 떠났다. 상하이에서 리커농, 치엔좡페이 등 동료들과 합류한 후디는, 꼭꼭 숨어 국민당 정보당국의 수사망을 피했다.
1931년 말, 후디는 루이진의 중앙 소비에트에 도착하였다. 그는 소비에트 국가정치보위국 심문과장 겸 홍군 총정치부 클럽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민당 26로군 중 1만 6천여명이 폭동을 일으키자 ―중국에서는 기의라고 표현― 선전대를 조직하여 홍군으로 재편성하는데 기여했다. 후디는, 그들은 “누구를 위하여 희생하는가?” 하는 제목으로 연극을 했으며, “흑인 노예의 한”이라는 작품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배우였던 재능을 살려 당에 공헌한 것이다. 이처럼 후디는 소비에트에서 극본을 쓰거나 연출을 맡는 등 문화부문에서 홍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하였다. 그 외에도 후디는 ‘선양의 포성’ ‘계급’ ‘의용군’ ‘다람쥐’ 등의 극본을 써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1934년 10월 홍군이 장정을 떠날 때, 그는 정찰과장에 임명되었다. 1935년에 그는 장궈타오의 좌로군에 함께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장궈타오가 마오쩌둥을 비롯한 당중앙의 ‘북상항일’ 방침을 거부하고 스스로 당중앙을 선포하는 등 분열행위를 하자, 후디는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그러자 장궈타오는 후디에게 “국민당 특무, 반혁명분자”라는 죄명을 씌워 정찰과장에서 해임하였다. 말까지 빼앗긴 후디는 대오의 끝에서 기진맥진 간신히 행군하였다. 그는 해진 옷에 양가죽 포대를 메고 있었는데, 장궈타오가 보낸 감시병이 뒤따르고 있었다. 대오가 쓰촨성의 마얼캉 지역에 이르렀을 때 장궈타오는 그를 살해하라고 명령하였다. 국민당 치하에서 살아남았던 일급 첩보원은 동지의 손에 의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1945년 중공은 그를 혁명열사로 추증하였다.
3. 리커농, 인민해방군 상장에 임명되다
전 3걸 중 끝까지 살아남아 수명을 다한 이는 리커농이다. 그는 1955년 인민해방군에 계급이 도입될 때 상장에 임명되었다. 상장은 국민정부 시절에는 중장과 대장 사이의 계급으로 알려졌으나 이때는 중장에 해당한다, 리커농의 일생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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