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철학 강좌 ― 제1강 철학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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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월간지 <정세와노동> 216호(2026.02)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자 주
신재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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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학이라는 무기: 왜 우리는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는가
우리는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히 지식의 축적에 있지 않다. 그것은 거대한 세계의 흐름 속에서 내 삶의 ‘운전대’를 타인에게 맡기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항해하기 위함이다. 철학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이자 미래를 개척하는 공격 무기이다.
1) 지배의 프레임을 깨고 주체적 사유의 틀을 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특정 사회의 지배적 의식, 곧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그물망 속에 놓인다.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1845~1846)에서 이렇게 썼다.
지배 계급의 사상은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사상이다.
이 명제가 뜻하는 바는,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들―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 사유재산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이 실은 자본주의라는 특정 체제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구성된 관념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관념이 대표적이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겉보기에 공정한 원칙처럼 보이지만, 출발선의 불평등―부모의 재산, 교육 환경, 사회적 연줄―을 은폐하면서 구조적 불평등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
철학은 이처럼 자명하다고 믿어 온 상식들에 “왜?”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왜 부동산 투기가 ‘재테크’라는 긍정적 이름으로 불리는가? 왜 정리해고가 ‘구조조정’이라는 중립적 용어로 포장되는가? 이 물음들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언어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진 계급적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작업이며, 이것이 바로 철학의 첫 번째 역할이다.
철학은 우리를 세상이 정해놓은 정답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수동적 존재에서 탈출시켜, 자신의 가치관을 스스로 설계하는 주체적 사유의 주인공으로 변모시킨다. 야생에서 늑대에게 양육되어 인간의 언어와 사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가 있듯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무비판적으로 길들여진 사람은 자신의 생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생각으로 사유하는 것에 불과하다. 철학은 이 길들여짐에서의 해방이다.
2) 파편화된 정보를 꿰어 시대적 통찰을 얻다
현대인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정보들을 유의미하게 연결하는 통찰의 눈은 상실해가고 있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뉴스, 영상, 게시물이 우리의 눈과 귀를 스쳐 지나가지만, 그것들이 왜 일어나고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철학은 감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파편화된 데이터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치 판단과 논리적 분석을 통해 이를 하나의 체계적인 구조로 직조해내는 힘을 부여한다. 부동산 가격 폭등, 비정규직 확산, 기후위기, 청년 자살률 증가 ― 이 현상들은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철학적 시야를 가진 사람은 이것들이 자본의 무한 축적이라는 하나의 구조적 동력에 의해 연결되어 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이 통찰을 통해 실현되는 ‘확장된 자아’는 개인적 감각의 범위를 넘어, 사회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현재의 사건이 지닌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게 한다. 나의 고통이 나만의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의 산물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그 고통의 진정한 원인과 해결의 방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3) ‘느끼는 몸’과 ‘생각하는 머리’의 분열을 극복하다
머리로는 ‘옳은 길’을 알지만, 몸은 무력감에 짓눌려 있는 분열,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면서도 “나 혼자 바꿀 수 없다”며 체념하는 무기력 ― 이것은 현대인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노동의 산물, 동료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을 ‘소외(Entfremdung)’라 불렀다(≪경제학-철학 수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1844)).
포르투갈 출신의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ónio Damásio)는 ≪데카르트의 오류(Descartes’ Error)≫(1994)에서 감정과 이성의 분리가 합리적 의사결정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신경과학적으로 입증했으며, 이후 ≪이상한 질서의 사물들(The Strange Order of Things)≫(2018)에서 사회적 조건이 신체의 항상성(homeostasis)을 파괴할 때 개인과 사회 모두가 병든다고 경고했다. 이 과학적 발견은 맑스의 소외론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 인간이 자신의 노동과 사회적 관계로부터 분리될 때, 몸과 마음의 통합적 기능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철학은 내 몸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의 사회적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이 분열된 자아를 통합한다. ‘내가 힘든 것은 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가 나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인식은, 개인적 무력감을 사회적 분노와 연대의 의지로 전화시킨다. 아는 대로 느끼고,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인격의 통일성’을 회복할 때, 비로소 세계를 바꾸려는 실천적 의지가 깨어난다.
4) 세상을 변혁하는 ‘물질적 힘’을 획득하다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는 설계도를 그리는 데 있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Einleitung)≫(1844)에서 이렇게 썼다.
이론도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 힘이 된다(Auch die Theorie wird zur materiellen Gewalt, sobald sie die Massen ergreift).
이 명제의 의미는 심원하다. 올바른 사유는 개인의 머릿속에 갇혀 있는 한 추상적 관념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대중의 의식 속에 뿌리를 내려 공유된 인식이 되는 순간, 현실을 실제로 변혁할 수 있는 물질적 힘으로 전화된다는 것이다. 1980년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시민들이 공유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군사 독재의 폭력에 맞서 무장 항쟁을 감행하게 한 물질적 힘이었으며, 1987년 6월 항쟁에서 전국적으로 분출한 민주화의 열망은 독재 정권의 항복을 이끌어낸 거대한 물질적 힘이었다.
철학은 고립된 개인의 외침을 집단적인 사회 의식으로 승화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를 억압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용기와 전략, 그리고 연대의 기초를 제공한다.
대본을 연기할 것인가, 대본을 쓸 것인가
철학이 없는 삶은 타인이 써 내려간 대본을 그대로 연기하는 수동적 배우의 삶과 같다. 그러나 철학을 소유한 삶은 자신의 대본을 스스로 집필하고 주인공이 되는 주체적 작가의 삶이다. 디지털 알고리즘이 우리의 관심과 감정을 포획하려 드는 오늘날, 철학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자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해방의 도구이다.
2. 철학의 재정의: 해석의 도구에서 변혁의 무기로
철학(Philosophy)은 고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 곧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유물론적 관점에서 철학은 단순한 지적 유희나 고결한 관조(觀照)를 넘어, 세계와 자아를 재구조화하는 가장 실천적인 정신 활동으로 재정의된다.
1) 전제에 대한 ‘근본적 의심’: 허위의식을 깨는 망치
철학의 본질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상식의 뿌리(root)를 파헤치는 데 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가?’,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경쟁은 사회 발전의 유일한 동력인가?’ ― 이러한 철학적 질문들은 일상의 배후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전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1장에서 확인했듯이, 맑스가 갈파한 “지배적인 사고는 흔히 지배 계급의 사고”라는 명제는 우리 머릿속의 ‘상식’이 대개 지배 구조가 심어놓은 이데올로기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다”라는 전제는 홉스(Thomas Hobbes) 이래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기본 가정이지만, 이를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면 경쟁과 사적 소유를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당화하게 된다. 그러나 인류학적 연구―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증여론(Essai sur le don)≫(1925) 등―는 상호부조와 호혜적 교환이 인류 사회의 보편적 특징임을 보여준다. ‘이기적 인간’이라는 전제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조건(자본주의적 경쟁 사회)이 만들어낸 구성된 관념인 것이다.
따라서 철학하기란 이러한 허위의식의 껍질을 부수는 ‘망치의 활동’이며, 맑스주의야말로 그 망치를 들고 현실의 모순을 타격하는 비판적 사유의 정점이다.
2) 파편화된 세계의 ‘총체적 파악’: 인식의 나침반
개별 과학이 세계를 경제, 심리, 물리 등으로 나누어 분석한다면, 철학은 그 파편들을 하나로 꿰어 세계의 전체 지도를 그린다. 철학은 부분적 지식들이 놓치기 쉬운 사물과 현상의 내적 연관성(법칙)을 변증법적으로 연결하고 체계적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 경제학은 실업률의 변동을 분석하고, 심리학은 실업자의 우울증을 연구하며, 의학은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을 치료한다. 각 과학은 자기 분야에서 유의미한 분석을 수행하지만, 이 세 현상이 하나의 공통 원인―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불안정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철학의 과제이다. 미세한 ‘신체의 느낌’(불안, 피로, 무력감)이 어떻게 ‘사회적 구조’(고용불안, 장시간 노동)와 결합하고, 그것이 다시 ‘노동’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활동의 왜곡(소외된 노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곧 철학이다.
이 총체적 인식의 도약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인식의 나침반’을 갖게 된다.
3) 삶을 주도하는 ‘실천적 설계도’: 변혁을 향한 의지
철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태도를 결정한다. 우리의 뇌로 쏟아지는 무수한 감각 정보에 가치(무엇이 중요한가)를 부여하고, 어떤 원칙에 따라 행동할지(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체성의 중심축이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1845년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Thesen über Feuerbach)≫의 제11조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rt; es kömmt drauf an, sie zu verändern).
이 명제는 철학을 관조의 영역에서 실천의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선언이었다. 해석은 변혁의 전제이지만, 해석에 머무는 철학은 절반의 철학에 불과하다. 철학은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설계도가 될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
4) 철학의 종합적 정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정신적 노동’
이상을 종합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이란 ‘내 사유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수동적으로 조종당하는 것을 멈추고, 비판적 인식이라는 도구를 들고 능동적으로 나의 세계를 조각해 나가는 과정’을 뜻한다.
철학은 난해한 고전이나 심오한 명언 속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당면한 사회적 현실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지식을 과시하거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철학은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진정한 철학하기는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정신적 노동이다.
진정한 철학하기는 ‘맑스주의적 실천’이다.
과거의 강단 철학이 주어진 정답을 암기하는 수동적 학습이었다면, 참된 철학하기는 끊임없는 질문과 비판적 사고를 통해 사유의 근육을 단련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지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곧 ‘물질적 힘’―을 얻고자 하는 사유의 투쟁, 이것이 바로 진정한 철학하기이며, 그 중심에 맑스주의 철학이 있다.
3. 맑스주의 철학의 본질: 과학과 혁명의 고도화된 통일
맑스주의 철학(변증법적 유물론 및 역사적 유물론)의 가장 혁명적인 지점은 철학을 하늘 위의 관념적 유희에서 땅 위의 실천적 투쟁으로 끌어내렸다는 데 있다. 이 철학은 과학성, 계급성, 혁명성(실천성), 창조성이라는 네 가지 기둥 위에 세워진 노동계급의 사상적 무기이자 인류 해방의 나침반이다.
1) 과학성: 객관적 법칙의 발견과 정수의 계승
맑스주의는 주관적 희망이나 도덕적 당위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객관적 법칙에 대한 과학적 인식 위에 세워졌다. 엥겔스는 19세기 자연과학의 3대 발견―슐라이덴ㆍ슈반의 세포학설, 줄ㆍ헬름홀츠 등이 확립한 에너지 보존ㆍ전화 법칙,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의 변증법적 발전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고 평가했다(≪반뒤링론(Anti-Dühring)≫(1878)). 맑스주의 철학은 이 자연과학의 성과를 철학적으로 종합하여, 자연과 사회, 사유의 발전을 관통하는 보편적 법칙을 밝혀냈다.
동시에 맑스주의는 인류 정신문화의 정수를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서 ‘합리적 핵심’―사물의 운동과 발전의 법칙―을 추출하고, 포이어바흐의 기계적 유물론에서 ‘유물론적 기본 원칙’―물질이 의식에 선행한다―을 취하되, 헤겔의 관념론과 포이어바흐의 비역사성을 동시에 극복함으로써 양자를 유기적으로 통합했다. 레닌은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Три источника и три составных части марксизма)≫(1913)에서 맑스주의가 독일 고전 철학, 영국 고전 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라는 세 가지 원천의 비판적 종합이라고 정리했다. 이 과학적 토대 위에서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왜곡하려 했던 역사의 필연적 흐름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해냈다.
2) 계급성: 인류 보편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계급의 무기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철학은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진리”라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착취 계급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 경우가 많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제를 ‘자연적 질서’로 정당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중세에 봉건적 위계를 ‘신의 섭리’로 합리화한 스콜라 철학이 대표적이다.
맑스주의는 모든 사상에는 계급적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며, 자신이 노동계급과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무기임을 당당히 선언한다. 그런데 이 계급성은 편협함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높은 차원의 객관성으로 이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노동계급은 자본의 착취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며, 동시에 사회적 생산의 주체로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가장 심층적으로 구현하는 존재이다. 이 계급이 추구하는 해방은 자기 계급만의 이익이 아니라, 계급 지배 자체의 폐지―곧 착취하는 계급도 착취당하는 계급도 없는 사회의 건설―이다. 가장 진보한 생산양식의 대표자인 노동계급의 특수한 이익은, 인류 전체의 보편적 해방과 완벽히 일치한다. 이것이 맑스주의의 계급성이 편협함이 아니라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변증법적 근거이다.
3) 혁명성(실천성): 해석을 넘어 세계를 변혁하는 힘
맑스주의에서 실천(Praxis)은 철학의 시작이자 끝이다. 세계관은 진공 속에서 태어난 순수한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변혁하는 실천 속에서 형성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2장에서 확인한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제11조―“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는 이 철학의 심장이다. 이 명제는 철학이 현실 바깥의 서재에서 현실을 ‘관조’하는 활동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현실을 변혁하는 활동이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1장에서 살펴본 맑스의 명제를 다시 상기하자.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그것은 물질적 힘이 된다” 물질적 힘은 오직 물질적 힘으로만 타격할 수 있지만, 이론이 대중의 가슴에 닿아 그들의 의식을 장악하는 순간, 그 사유는 세상을 뒤엎는 거대한 물질적 힘으로 변모한다. 맑스주의는 이 전환―이론에서 물질적 힘으로의 전환―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철학이며, 이 점에서 이전의 모든 철학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4) 창조성(혁신성): 교조를 거부하는 살아있는 유기체
맑스주의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과 인간 해방이라는 과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맑스주의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스스로를 끊임없이 혁신하는 열린 체계이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의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스스로, “이 선언의 일반 원칙은 전체적으로 오늘날에도 완전히 올바르지만, … 개별적인 점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이 있다”고 고백할 만큼 철저한 자기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이 태도는 맑스주의의 본질적 특성이다. ― 이론은 현실의 변화에 의해 끊임없이 검증되고 갱신되어야 한다.
1888년 플로렌스 켈리비슈네베츠키(Florence Kelley-Wischnewetzky)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의 이론은 교조(Dogma)가 아니라 행동의 지침이다.
맑스 자신도 생전에 일부 프랑스 맑스주의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경직된 공식으로 적용하는 것을 보며,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나 자신은 맑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라고 개탄했다고 엥겔스가 전하고 있다(엥겔스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 1882년 11월 2-3일). 이 일화는 맑스주의가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 따라 살아 움직여야 하며, 박제된 공식으로 경직되는 순간 자기 자신을 배반한다는 것을 웅변한다.
맑스주의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형식을 갱신하되(혁신), 그 근본적 핵―노동계급의 해방과 계급 없는 사회의 건설―을 잃지 않는 역동적인 사유 체계이다.
4.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해방의 지도를 찢는 자들에게
맑스주의 철학이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변혁하기 위한 ‘무기’라면, 20세기 후반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무기의 날을 무디게 하고, 급기야 무기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선언하는 사상적 조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겉으로는 모든 권위와 억압에 저항하는 급진적 사유를 표방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총체적 비판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상적 무장해제에 다름 아니다. 맑스주의는 왜 이 ‘세련된 항복 선언’에 맞서야 하는가?
1) 거대서사의 폐기: 해방의 나침반을 스스로 부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이론가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는 ≪포스트모던의 조건(La Condition postmoderne)≫(1979)에서 “극도로 단순화하면, 나는 포스트모던을 거대서사(grand récit)에 대한 불신으로 정의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거대서사란 계몽주의의 이성적 해방, 헤겔의 절대정신, 그리고 맑스주의의 역사유물론 등 역사의 방향과 의미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이론 체계를 가리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모든 체계적 설명을 ‘억압적 환원’으로 규정하고 폐기를 선언한다.
그러나 이 선언이 실제로 타격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피지배 계급의 해방 이론인가?
자본의 논리는 거대서사의 형태를 취하지 않아도 전 지구적으로 관철된다. 주식시장의 알고리즘은 리오타르의 허락을 구하지 않으며, 삼성전자의 글로벌 공급망이나 아마존의 물류 체계는 ‘서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붕괴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확산되어 수천만 명의 일자리를 앗아간 사건이었다―이 위기의 전 지구적 연쇄는 자본주의가 하나의 총체적 체계로 작동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거대서사를 폐기당하는 쪽은 오직 이 현실을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변혁하려는 노동계급의 사상적 무기뿐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1991)에서 정확히 간파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1970년대 이후 유연적 축적 체제로 전환하면서 만들어낸 파편화ㆍ분산화ㆍ표면성의 문화가 이론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증상’이며, 열병에 걸린 환자가 자신의 고열을 ‘새로운 체온’이라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 총체성의 거부: 적의 전체 지도를 보지 않고 전쟁에 나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파악하는 총체성(Totality) 개념 자체를 ‘폭력적’이라 비판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déconstruction)는 서양 형이상학의 이항대립적 위계를 허물고,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과타리(Félix Guattari)는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1980)에서 중심 없는 리좀(rhizome)적 사유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들에게 세계를 하나의 구조로 읽으려는 시도는 다양성에 대한 억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실제로 전 지구적 총체성으로 작동한다. 방글라데시 봉제공장의 저임금과 뉴욕 패션위크의 화려함은 하나의 가치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2013년 방글라데시 다카(Dhaka) 근교의 라나플라자(Rana Plaza) 건물 붕괴로 1,134명의 봉제 노동자가 사망한 참사는, 서구 다국적 브랜드들이 최저 단가를 추구하며 안전 기준을 무시한 하청 구조의 직접적 결과였다. 콩고민주공화국 광산의 코발트 채굴과 실리콘밸리의 첨단 스마트폰은 동일한 자본 축적 논리의 양면이다. 이 연결 고리를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각각의 문제를 고립된 사건으로만 바라보게 되고, 그 배후에 있는 공통의 구조적 원인―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을 영원히 포착할 수 없게 된다.
2장에서 밝혔듯, 철학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파편화된 세계를 꿰어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의 나침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나침반을 부수고서 “방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방향이 없다는 선언은 현재의 자리―곧 자본주의라는 현 체제―에 영원히 머물라는 것과 실질적으로 다름없다. 적의 전체 전선(戰線) 지도를 보지 않고서는 어떤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
3) 주체의 해체: ‘누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라는 물음의 소거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주체란 자율적 실체가 아니라 권력-지식(pouvoir-savoir)의 담론적 효과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 주장했고(≪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1975)), 데리다는 통일적 자아의 현전(現前, présence)을 형이상학적 환상으로 해체했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1967)).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주체는 분열적이고, 유동적이며, 중심이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주체의 해체는 결정적인 정치적 귀결을 낳는다. “누가 세상을 바꾸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소거되는 것이다. 맑스주의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변혁할 역사적 행위 주체임을 명확히 한다. 3장에서 확인했듯, 노동계급은 자본의 착취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며, 동시에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가장 심층적으로 구현하는 존재이기에, 그들의 해방은 곧 인류 전체의 해방으로 직결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체를 ‘담론의 효과’로 용해시키는 순간, 계급 의식도, 연대도, 혁명적 행위 능력(agency)도 모두 증발한다. 남는 것은 서로 환원 불가능한 미시적 정체성들의 무한한 분산뿐이다. 한국의 노동 현실에서 이 문제는 첨예하게 드러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내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사이의 분열은 자본이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분할 통치의 산물이다. 이 분열을 넘어 공통의 계급적 이해를 인식하고 연대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핵심 과제인데, 주체의 해체론은 바로 이 연대의 가능성 자체를 이론적으로 부정해 버린다.
1장에서 강조했듯, 철학의 핵심 과제는 “느끼는 몸과 생각하는 머리의 분열을 극복”하여 인격의 통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통일 자체를 허구로 선언함으로써, 분열된 현대인의 소외를 치유하기는커녕 이론적으로 정당화한다.
4) 진리의 상대화: 착취의 ‘사실’마저 하나의 ‘관점’으로 전락시키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진리 자체에 대한 공격이다. “객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지식은 특정 맥락에서 구성된 담론에 불과하다”는 선언은 표면적으로 겸손한 인식론처럼 보이지만, 그 정치적 효과는 처참하다.
만약 객관적 진리가 없다면,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착취당한다는 ‘사실’도, 제국주의가 제3세계를 수탈한다는 ‘현실’도 단지 하나의 ‘관점’, 하나의 ‘서사’, 하나의 ‘담론’으로 전락한다. 자본가의 관점과 노동자의 관점이 동등한 ‘해석’이라면, 왜 한쪽의 고통이 다른 쪽의 이윤보다 우선되어야 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떤 객관적 근거도 제시할 수 없다.
한국의 구체적 현실에서 이 문제를 보자. 2022년 기준 한국의 상위 10% 소득 점유율은 약 46.5%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 World Inequality Database). 이것은 ‘관점’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사실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약 38%에 달하며(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23),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 대비 약 50~60%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현실이다. 이 사실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상대화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 불평등을 유지하고 있는 구조를 비판할 언어 자체를 빼앗는 것이다.
영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맑스주의 이론가인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The Illusions of Postmodernism)≫(1996)에서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차이를 축하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부자와 빈자의 차이는 축하할 일이 아니다.
2장에서 정의했듯, 철학의 본질은 “허위의식의 껍질을 부수는 망치의 활동”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망치가 타격해야 할 대상(허위의식)과 지켜야 할 것(과학적 진리)의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담론이라면 허위의식도, 과학적 인식도 동등한 ‘이야기’일 뿐이며, 비판의 근거 자체가 사라진다.
5) ‘차이의 정치학’의 함정: 계급이라는 핵심 전선의 은폐
포스트모더니즘은 젠더, 인종, 성적 지향, 문화 등 다양한 정체성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며, 이를 ‘차이의 정치학(politics of difference)’으로 이론화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소중하며, 맑스주의 역시 여성 억압, 인종 차별, 민족 문제 등을 결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hums und des Staats)≫(1884)이 여성 억압의 역사적ㆍ물질적 뿌리를 분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문제들은 맑스주의의 정당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이 다양한 억압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공통의 토양을 파악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체성을 무한히 분산시키면서, 정작 이 모든 억압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계급(class)이라는 근본 범주를 주변화시킨다.
한국 사회의 현실이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성 차별은 단지 성차별적 문화의 문제만이 아니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OECD 국가 중 최대 수준(2022년 기준 약 31%, OECD 통계)이며, 이 격차는 자본이 여성 노동력을 저임금 구조에 배치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메커니즘과 직결되어 있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 역시 순수한 인종적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고용허가제라는 제도를 통해 이주 노동자를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저임금 노동력’으로 관리하는 자본의 구조적 요구와 맞물려 있다.
자본주의는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을 자신의 이윤 논리에 능동적으로 활용하며, 노동자를 피부색과 성별, 국적, 고용 형태로 분열시켜 통일적 저항을 막는다. 차이의 정치학이 이 분열의 메커니즘을 직시하지 않고 차이 자체만을 긍정할 때,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본이 원하는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의 이론적 정당화로 기능할 위험이 있다.
3장에서 밝혔듯, 맑스주의의 계급성은 편협함이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객관성”이다. 노동계급의 해방이 곧 모든 억압의 폐지로 이어지는 까닭은, 계급 지배가 제거될 때 그것에 기생하는 여타의 억압 구조들 역시 물질적 토대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전선에서의 투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계급이라는 핵심 전선을 대체할 때가 아니라 그것과 결합할 때 비로소 해방의 실질적 동력이 된다.
6) 화려한 패배주의: 혁명의 불가능성을 이론으로 포장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계보를 추적하면, 그 뿌리에는 1968년 이후 유럽 좌파 지식인들의 역사적 좌절이 놓여 있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드골 정권을 위협했던 대규모 봉기는 결국 기존 체제의 틀 안에서 수습되었다. 이후 소련의 관료주의적 경직과 궁극적 해체(1991), 서구 노동운동의 후퇴,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공세 ― 이러한 패배의 경험이 “변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론적 합리화로 승화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무의식이다.
테리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에서 이를 날카롭게 진단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적 패배의 경험을 이론적 미덕으로 전환시킨 것”이며, 혁명적 전망을 상실한 자들의 세련된 패배주의라는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이 학문적 영향력을 확대한 시기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승리를 구가하던 1980~1990년대와 정확히 겹친다. 마거릿 대처가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고 선언하던 시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학술적 언어로 동일한 메시지―‘체계적 대안은 불가능하다’―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패배주의는 자기모순으로 가득하다. “거대서사의 종말”이라는 선언 자체가 하나의 거대서사가 아닌가? “보편적 진리는 없다”는 주장 자체가 보편적 진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권위를 해체한다면서, 왜 해체 자체의 권위는 의심하지 않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신이 비판하는 바로 그 논리적 구조를 자신도 모르게 반복한다. 이는 이 사조가 스스로 설 수 있는 견고한 철학적 기반을 갖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7)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비판의 칼날을 되찾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한 문제의식―권력과 지식의 결탁, 본질주의의 위험, 소수자의 목소리에 대한 경청―을 무조건 폐기할 필요는 없다. 이 물음들은 오히려 맑스주의가 더욱 정교하게 답해야 할 과제이다. 푸코가 밝힌 미시 권력의 작동 방식, 데리다가 드러낸 언어적 위계의 은폐 메커니즘은 맑스주의적 분석의 정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부분적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진리를, 총체성을, 변혁의 주체를, 역사의 방향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답이 아니라 항복이다.
기아와 전쟁, 착취와 생태 파괴가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구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체계적 분석 자체가 폭력”이라는 선언은 결국, 이 폭력적 현실을 영속시키는 데 복무한다. 칼을 든 강도 앞에서 “칼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겠다”는 것은 지적 유희이지 저항이 아니다.
맑스주의 철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파편화시킨 세계의 조각들을 다시 꿰어, 자본주의 체제의 총체적 지도를 복원한다. 해체가 아니라 재구성(reconstruction)을, 해석이 아니라 변혁(revolution)을, 무력감이 아니라 연대의 힘을 이 철학은 요청한다.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그것은 물질적 힘이 된다.” ― 이 명제가 여전히 유효한 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사유가 아니라, 그것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사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도를 찢었다면, 맑스주의는 그 지도를 다시 그린다. 더 정밀하게, 더 정확하게, 그리고 변혁의 경로를 선명하게 표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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