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칼럼] 과학과 주체성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과학칼럼] 과학과 주체성

profile_image
노동자신문
2025-04-07 02:38 202 0

본문

  

신명호 (과학기술평가예측센터)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이 동시에 자연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삶과 앎은 사회적 생산에 기초해 있고 사회적 관계의 틀 속에서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적 생산은 자연을 이용하고 활용하는 자연적 생산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자연적 생산성은 우리가 결코 떠날 수 없는 토대이다. 현재의 위기와 전환은 우리 자신의 삶과 앎의 기반으로서의 자연을 파괴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근대 과학이 발전된 순간 인간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자연과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우리는 자연을 우주적 규모로 위협하고 있고, 우리 자신의 기반인 자연을 파괴하여, 결국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길로 가고 있다. 기후위기, 핵무기, AI, 펜데믹 등 각각의 커다란 위기들의 기원에는,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어떤 근본적인 결함이 작동하고 있을지 모른다. 마치 언어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워 발명되거나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인 그러한 생각의 방식이 우리를 이러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과학의 영역에 등장하는 현상은 그것들이 이론의 이미 결정적인 대상 연관 관계에 들어맞을 수 있도록 가공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론이 아니다. 과학은, 가능태까지를 포함한 사물 본연의 모습을 드러나는 대로 파악하는 활동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가공하는 활동, 즉 기술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기술이 과학의 응용이 아니라 과학 자체가 원천적으로 기술이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의 성공적인 기술적 전환은 정확히 표현하면 과학의 진면목이 현실화되는 과정이다. 자연 과학의 기술적 전환의 성과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과학의 학적 활동, 즉 이미 짜놓은 획일화의 윤곽에 존재자가 들어맞도록 가공하는 작업은 사물의 공동화를 초래한다. 과학은 모든 존재자를 인과관계로 얽어매며, 과학의 활동들은 이미 짜놓은 획일화의 윤곽에 존재자들이 들어맞도록 가공하는 작업이 된다. 이제 사물은 가공자의 목적에 따라 조직적으로 끝없이 활용되고 사용되고 소모되는 체계 안에 부속됨으로써만 그 존재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렇게 존재자가 도구적으로 현실화되는 존재 양태는 하이데거 주장대로 부속품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과학과 그의 응용을 통한 존재의 현실화에는 실재의 전면적인 부속품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결합한 과학기술은 이 과정을 가속화하여, 자연적 생산성의 파괴뿐 아니라 인간 자체를 가공의 대상으로 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abfe971f9a4fdc3e062c12b4d2a67ed1_1743963697_3464.png
△ 이미지 : Chat GTP


과학과 기술이 진보를 의미하던 시대가 있었다. 과학과 기술의 역사와 사회학 연구는 이전의 통념을 부수었다. 전쟁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력이었고, 19세기 이후 폭발적인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했다. 과학기술은 생산력 증대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물적 기반을 혁신하는 기반이 되었다. 과학과 기술은 자본주의 착취와 파괴의 역사에서 주역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악마와의 계약이 되어버린 과학과 기술을 민중의 힘으로 재전유하여 그 해방의 힘을 복원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일리치 (Ivan Illich)가 요청한 것처럼, 우리가 인간조건의 생태적 기초와 근원적 탐구 행위로서의 과학이라는 관점을 채택하고, 인류가 지구에서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개시한 이래 발생한 생태적 파국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시도에 과학과 기술의 존재 근거를 둘 수 있을 것인가? 구제, 치유, 회복을 위한 탐구행위로서의 과학기술, 사물과 환경에 대해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갈등 해결과 공생을 위한 도구를 생산해 내고, 사회적생태적 필요와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구성해 내기 위한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존재자를 인과관계에 얽매고 획일화하고 실재의 전면적인 부속품화를 추구하는 과학기술을 어떻게 교정할 것인가?


abfe971f9a4fdc3e062c12b4d2a67ed1_1743963816_8503.png
△ 이미지 : Chat GTP


생명체는 인과관계라는 철의 법칙을 넘어서고 극복함으로써 진화한다. 생명체의 지향적 의식, 삶의 자기구성, 자율생성과 자기조직화에 객체적 세계 개념으로부터의 해방의 단초가 있다. 생명체는 외적 환경과 조건을 내면화함으로써 그냥 있는 상태로서의 물질로부터, 즉 객체로서의 존재 양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재의 안정성을 구성해 나가야 하는 주체적 존재 양태로 전환된다. 그 자신의 존재가 이미 주어진 객체적 존재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존재 양태로, 즉 주체적 존재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존재의 역사는 존재자의 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존재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자기 구성의 존재자가 출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나 그리고 인간만이 주체가 아니라 다가오는 모든 것이, 즉 존재 자체가 주체로 인정될 때 비로소 세계는 다중심적 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각 존재자는 그 고유의 세계, 즉 서식처나 환경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어 진정한 의미의 다원적 세계관이 성립될 수 있다. 모든 존재자는 주체로서 각각의 세계를 상호 인정하는 근본적인 자연적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하여 실천성을 획득할 때, 반성적이고 윤리적인 주체가 등장한다.

 

과학은 주체성을 필요로 한다. 이 주체성은 철의 법칙이라 할 수 있는 자연적사회적 법칙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가면서 이 법칙들을 넘어서고 더 높은 단계에서 종합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신비는 혹세무민하는 기적과 예언, 자연적사회적 인과관계로 촘촘하게 만들어 놓은 철의 법칙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과관계라는 철의 법칙으로 구성된 객체적 세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유의지, 한 번의 발화와 한 순간의 사유, 한 번의 동작에서도 일어나는 창조, 과거와 미래를 향해 뻗어가는 상상력, 공생을 위한 협동과 연대야말로, 역사에 임하는 하느님이고 세계사를 실현하는 정신이며 사적유물론의 역사적 일반법칙의 작동자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거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과학기술이 본래의 해방적 힘을 다시 획득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체성에 달려 있다. 과학기술을 민중이 재전유하지 않는 한 노동해방은 불가능하다. 노동계급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주체성은 무엇인가? 우리의 이성과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2025. 4. 4)  ※ 밑줄은 모두 편집자

 

5447152931d27703f75ee59a39a0a0b7_1743962480_3188.jpg


5447152931d27703f75ee59a39a0a0b7_1743962480_2607.png


b2df6d51ea70679e347d8be70feb4e1f_1743545423_0682.jpg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