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노조 투쟁이 변혁적 노동운동에 던진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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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중
삼성전자 노조의 투쟁이 예상대로(?) 총파업의 파국 직전 잠정합의안을 도출하고 조합원 찬반투표를 진행 중이다. 이번 삼성전자 노조의 행보는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다른 대기업 노조들이 걸어왔던 경제주의적 실리 투쟁의 궤적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이번 투쟁은 삼성이 독식한 초과 이윤 중 성과급 요구 금액이 수십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규모였기에 사회적 논란이 더 컸을 뿐이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현재 대기업 노조 투쟁의 본질을 자본주의 체제 변혁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1. 삼성전자노조 투쟁을 단순히 ‘노동권 보장’과 ‘노동의 대가 요구’ 프레임으로만 지지해야 하는가?
‘노동권 수호’와 ‘정당한 대가 요구’라는 프레임으로만 삼성 파업을 지지하는 것은, 당장 눈앞의 파업을 엄호하는 데는 유용할지 몰라도 결코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키거나 사회 구조를 바꾸는 동력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이는 자본이 가장 무서워하지 않는 '순한 맛 파업 지지'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담장 밖과의 연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대기업 노조는 적당히 자본을 압박하다가 어느 선에서 실리를 챙기면 투쟁을 회피하곤 한다. 즉, 그들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에 균열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적절히 타협하여 그 틀 안에서 자신들의 파이를 키우기 위한 투쟁이다. 심지어 대외적으로는 형식적인 연대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완강한 공동 투쟁 없이 자신들의 실리만 챙기는 '명분 세탁용 연대'에 그치는 것이 대기업 노조의 현실이다.
2. 준비되지 않은 연대의 강요인가, 전선의 독자적 구축인가?
그렇다면 연대를 원치 않는 투쟁에 억지로 연대를 들이밀어야 하는가? 준비되지 않은 연대는 연대가 아니라 ‘침범’이며, 현장 조합원들의 거부감만 키우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대기업 노조가 연대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은 연대투쟁의 경험 부족, 또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상대적으로 '잃을 것이 많은 노동자'다.
파업이 장기화되면 무노동 무임금으로 인한 생계 타격이 크고, 정권이 가해오는 탄압(징계, 해고, 손배가압류)의 위험을 굳이 무릅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적당히 회사를 압박해 최대치의 실리(임금, 성과급)를 얻어내면, 그 선에서 투쟁을 멈추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조합원 대중의 솔직한 욕망’이자 현실이다.
현장 정서가 이러함에도 "그래도 연대해야 한다"고 당위만 외치는 것은 아무런 변혁적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연대를 원치 않는다고 해서 정부와 자본이 그들을 향해 던지는 돌팔매질(귀족노조 프레임, 긴급조정권 협박)에 동조해서는 결코 안 된다. 노동자가 자본에 맞서 싸우는 기본 권리인 노동3권 자체는 철저히 옹호하고 방어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리 투쟁의 한계'를 조합원들이 스스로 겪어보게 두는 것이다. 적당히 타협해서 실리를 챙기는 것도 자본이 양보할 여력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자본이 끝까지 불통으로 나오거나, 정부가 공권력(긴급조정권 등)으로 정규직 노조의 목을 죄어올 때, 그들은 비로소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되는구나’, ‘법과 정권 자체가 자본의 편이구나’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그 장벽에 부딪혀 노조가 고립감을 절감하고 스스로 연대의 필요성을 느껴 손을 내밀 때, 비로소 역효과 없는 '살아있는 연대'가 시작될 것이다.
그들의 실리주의적 본질과 한계를 냉정하게 인정하면서, 그들이 자본과 정권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절망하는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투쟁의 한계에 직면한 이들이 진짜 우군을 찾을 때 강력한 연대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대중을 각성시키는 진짜 연대다.
오히려 변혁적 활동가들은 이 기회를 통해 삼성 등 대기업이 누리는 거대한 부의 이면에서 고통받는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조직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하청 노동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거대 자본을 상대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요구하는 독자적 투쟁 전선을 조직해 내는 것이 지금 활동가들의 시급한 과제다.
3. 노동자 계급의식은 투쟁 속에서 ‘저절로’ 발전하는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수십 년간 완강한 투쟁을 전개해 왔던 대기업 노조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1980년대 선진적인 노동운동이 무너지고 90년대 이후 대기업 노조들이 급격히 실리주의로 돌아선 결정적 계기는, 격렬한 투쟁 끝에 돌아온 구속, 해고, 손배가압류 폭탄이 남긴 극심한 패배주의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수십 년간 축적된 투쟁의 경험이 노동운동의 질적 발전으로 이어져야 함에도, 오늘날 대기업 노조의 투쟁은 자본과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멈추고 있다. 오랜 투쟁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역설적으로 '적당히 타협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이롭다'는 개량적 지혜를 체득한 것이다. 심지어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의 성벽을 지키기 위해 담장 안으로 진입하려는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을 탄압하거나 외면하는 모순마저 발생하고 있다. 투쟁 그 자체가 자동으로 혁명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다.
4. 변혁적 활동가들의 진짜 역할은 무엇인가?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 투쟁은 외부의 지지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분노와 이익에 기반하여 폭발한다. 그러나 이 투쟁은 아무리 치열하고 장기화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임금을 더 받거나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조합주의(실리주의) 의식을 스스로 넘어설 수 없다.
모진 탄압을 받아 파업이 깨졌을 때, ‘의식의 주입이나 올바른 계급적 해석’이 결합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이 내리는 결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자"가 아니다. 오히려 "거 봐라, 나서봤자 나만 손해다. 가만히 중간만 가는 게 장땡이다"라는 철저한 패배주의와 냉소주의로 침잠할 뿐이다. 탄압이라는 객관적 조건 자체가 노동자의 의식을 자동으로 업그레이드해 주지는 않는다.
자본가 계급이 경제·정치·사법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단발성 노동자 투쟁은 패배로 끝나기 쉽다. 중요한 것은 그 패배의 과정에서 패배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동지적 연대 투쟁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모순을 인식하게 하고 체제 변혁의 당위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레닌은 이를 두고 “계급의식은 노동자 내부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외부로부터의 주입'이란 단순히 지식인의 훈계가 아니라, '전체 사회 구조와 모순의 본질을 볼 줄 아는 변혁적 활동가 조직의 의식적 개입'을 뜻한다.
자본과의 투쟁이 격렬해질 때, 노동자 내부에서는 타협주의, 개량주의, 기회주의 사상도 함께 발전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본과의 투쟁은 한편으로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개량주의 및 기회주의 사상과의 치열한 사상 투쟁을 동반해야 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폭발한 노동자 투쟁은 조선공산당 재건과 남조선노동당 창당, 그리고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건설을 통해 '노동해방'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비록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노동운동이 수십 년간 암흑기에 갇혔으나,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불꽃으로 다시 일어선 노동운동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그 축적된 결과물이 95년 민주노총 건설이었으며, 96-97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을 거치며 2000년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노동당 창당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96-97 총파업 투쟁 같은 역사적 상승기에 노동자 계급의식이 그토록 급속하고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자연발생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단위 사업장의 성벽을 뛰어넘고 노동자들의 경제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계급적 사상을 주입하고 연대를 조직했던 변혁적 활동가들의 피땀 어린 활동과 목적의식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삼성전자 노조 투쟁이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사회변혁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비판적 지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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